[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㉛ 호국영령들의 안식처, 국립서울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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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㉛ 호국영령들의 안식처, 국립서울현충원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30 09:3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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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지난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이었습니다. 휴전선이 대표적 흔적이긴 하지만, 국립서울현충원 또한 한국전쟁이 남긴 대표적 상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시신을 고향에 안치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전사자들의 유골을 집단 묘지에 안치하고 신사와 충혼탑 등을 설치해 전사자를 숭배하는 죽음의 공공화를 진행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러한 죽음의 국유화 경향에 익숙해지게 되었다고 연구자들은 분석합니다. 

특히, 해방 후 남한 정부는 죽음의 공공화, 혹은 국유화를 정통성 확보나 국민 단합의 방편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 배경에 ‘전사자 숫자의 급증’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전에 남북간 교전으로 8800명 전사

단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한반도에는 남북 곳곳에서 국지전이 벌어져 전사가가 늘어나게 됩니다. 전쟁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해방 후부터 6·25전쟁 전까지 남북 교전에 의한 전사자가 8800 명이 넘습니다. 남한 정부는 정통성 보강을 위해 이들 전사자를 앞세워 국가적 성역 창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이용한 곳이 장충사(奬忠詞)였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 등을 참고하면 정부는 1948년경부터 장충사에 전사자들의 유골을 안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최초의 안치는 1949년 6월 6일에 이뤄지는데 447기의 국군 전사자 유골을 장충사에 봉안하게 됩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국방부 의장대. 사진=강대호

1950년 6월에는 장충사가 ‘국가적 신전’의 지위까지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신문 기사들을 종합하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전사자들의 영현을 합사하기 위해 서울 장충사를 증축했고, 영현 1664기를 장충사에 새로 봉안한 걸 기리며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인 서울운동장에서 ‘전몰 군인 합동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오전 10시 사이렌이 울리자 서울운동장에 모인 참가자들이 장충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고 이 기사들은 전합니다. 그날이 1950년 6월 21일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4일 전이었지요. 

당시 기사들로 유추하면 장충사(奬忠詞)는 장충단(奬忠壇) 영역 안에 있던 시설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충성을 장려하기 위한 제단’이라는 뜻을 가진 장충단은 1900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벌어졌을 때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었지요. 

그런데, 장충사의 정확한 위치와 시설에 대해 관련 연구자들이 제기한 여러 가설이 있습니다. 옛 장충단 시설을 활용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박문사 건물을 활용했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로 장충단 영역 안에 건립했던 박문사에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골을 안치했다는 거죠. 

1950년 6월 21일 동아일보에 실린 ‘전몰 군인 합동 위령제’ 사진을 보면 언뜻 박문사 본관처럼 보이는 건물이 배경에 나옵니다. 해방 후 화재로 전소됐다거나 철폐됐다고 알려진 박문사 본관 건물이 한국전쟁 즈음까지 건재했던 걸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1950년 6월 21일 동아일보에 실린 ‘전몰 군인 합동 위령제’ 기사. 사진은 행사가 열린 장충사인데 배경에 나온 건물이 박문사 본관 건물이다.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로 장충단 영역 안에 건립되었다. 출처=동아일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한편, 국립서울현충원 자료를 보면 육군에서 전사자의 영현을 모시기 위한 묘지 설치 안건이 논의되어 1949년 말부터 서울 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했다고 합니다. 전사자가 많이 늘어나 서울 시내의 장충사만으로는 부족했다는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육군의 묘지 물색 시도는 중단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중 육군에서는 부산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해 육군 전사자들의 영현을 모셨습니다. 해군과 공군도 각기 영현 봉안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던 1952년 국방부는 육군만이 아닌 육해공 삼군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종합묘지를 추진하게 됩니다. 명칭도 ‘국군묘지’로 정하고 장소도 물색하게 됩니다. 마침내 정전 직후인 1953년 9월 국방부는 동작동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는 묘역 조성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서달산 자락의 동작동 일대에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국군묘지 조성을 위해 국가는 토지를 수용했고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1954년 8월 25일 조선일보에 실린 ‘국군묘지 내 거주자 철거 보상금을 지불’이라는 기사가 그때의 일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부지 내에 거주하던 63동의 주택 거주자에게 철거 대가로 197만 삼천 환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건축 목재 상당량을 유상 배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목재는 철거민들이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재를 말합니다. 

더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서달산 자락에 살던 이들은 멀지 않은 곳으로 이주해서 집을 짓고 살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뒷이야기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서달산 자락의 국군묘지 부지 안에는 마을뿐 아니라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현재 대통령 묘역 사이에 자리한 ‘창빈 안씨’의 묘역이 그렇습니다. 창빈 안씨는 조선 중종의 후궁이며 선조의 할머니입니다. 

이 지점에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국군묘지 부지 안에 마을이 있었다면 그 마을 인근에 묘지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나라 전통 마을 인근에는 묘지가 있기 마련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아마도 국군묘지 조성 과정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던 주민들처럼 기존 묘지들도 파묘해 이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창빈 안씨’의 묘역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왕족의 무덤이라 묘를 없애지 않은 걸까요?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여의찮았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국군묘지 관련 서류들은 거의 비공개 등급이었습니다. 외빈이나 국내 인사가 국군묘지를 방문한 사진 정도만 공개하고 있지요.

국립서울현충원의 한 작업자가 글씨가 흐릿해진 묘비에 먹물을 입히고 있다. 사진=강대호

아무튼, 서달산 자락의 동작동 일대에 3년에 걸쳐 국군묘지 묘역 약 7만2000 평이 조성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약 42만 평 이상으로 국군묘지 영역이 늘어나게 됩니다. 묘역 공사가 완공되자 각 군의 영현 봉안소에 안치되었던 영현들은 1956년 9월 10일을 기해 동작동의 국군묘지에 봉안됩니다. 

그 이후 한동안 동작동 국군묘지는 군인 위주로 안장 업무가 이뤄지다가 1965년 3월 ‘국립묘지’로 되어 애국지사와 경찰관은 물론 향토예비군까지로 안장 대상이 확대되었습니다. 2005년 7월에는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었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서울현충원을 둘러싼 몇가지 논란들

국립서울현충원은 간혹 논란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을 흐르는 ‘현충천’에 놓인 다리인 ‘정국교(靖國橋)’가 그렇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 다리의 이름인 ‘정국(靖國)’을 일본어로 읽으면 ‘야스쿠니’이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전쟁의 전범들을 합사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한자를 씁니다.

사실 ‘정국’은 중국 고대 역사서인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해 나라를 평온케 한다’는 뜻을 가진 ‘오이정국야(吾以靖國也)’라는 글귀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국립서울현충원 경내를 흐르는 현충천에 놓인 정국교. 사진=강대호

현충원 측은 논란을 의식했는지 정국교 입구에 표석을 설치하고는 다리 이름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1958년 건립 당시 함태영 부통령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부식의 호 ‘수충정난정국공신’에서 따서 이름을 지었다”며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가호로 나라의 평화와 번영이 이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뜻을 품고 있다고 해도 오해를 사게 되거나 누군가가 다르게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립서울현충원 측은 다리 이름에 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의견을 표명하곤 했습니다. 이는 올 6월부터 국방부 대신 현충원을 관장하게 된 국가보훈부도 마찬가지 입장일 듯합니다.

독립 부처로 승격된 국가보훈부가 야심 차게 진행한 일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힌 어느 유명 장군이 친일파였다는 기록을 보훈부 측에서 지운 겁니다. 기록을 지운다고 해서 했던 일이 없던 일로 되는 건 아닐 텐데 말이죠. <매주 일요일 연재>

국립서울현충원 전경.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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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2023-07-30 13:33:48
1549년(명종 4) 사망하자 양주(楊州) 장흥(長興)에 예장했다가 이듬해 3월 지금 자리로 이장했다.
덕흥대원군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선조로 왕위에 오르자 1577년(선조 10)에 창빈으로 추존됐다. 묘를 옮긴 곳 지명에 따라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다. 현재 동작구 지역이다.

국립서울현충원 2023-07-30 13:32:10
충현지를 떠나 윗쪽으로 한참 올라가니 이승만대통령 묘소 부근에 ​창빈안씨(昌嬪 安氏) 묘소가 나타난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조선시대 왕실묘소가 너무 생소하다. 조선 제11대 중종 후궁(後宮)으로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의 신도비와 묘다.창빈은 1499년(연산군 5)에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시흥(始興)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재질과 용모가 뛰어나 1507년(중종 2)에 궁녀로 들어갔다.행동이 정숙하고 단정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후의로 31살때 숙원(淑媛)에 이어 숙용(淑容)에 올랐다.자비로운 성품으로 덕망이 높았다.중종과 사이에 영양군(永陽君)과 덕흥대원군(德興大阮君),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뒀다.덕흥대원군(德興大阮君)이 선조의 아버지다.

국립서울현충원 2023-07-30 13:30:16
정문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현충지(顯忠池)'라는 연못 주변에 일반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연을 담은 두개 벤치가 보인다. 왼쪽 벤치에 '이곳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라는 글이 붙었다.검사 출신으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문인구(1924~2013년) 선생 후손이 기증한 벤치다. 문인구 선생은 순국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생전에 자주 국립현충원을 찾았다고 한다.​ 문인구 선생은 지난 1987년 대한변호사협회장 재직 중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에 반박성명을 냈다.변협회장으로 4·13 호헌조치에 ‘헌법과 민주주의, 인권을 무시하는 대통령 처사는 온당치 못하다’고 발표한 반박성명서는 호헌철폐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효시가 됐다.항상 나라를 생각하는 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