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㉙ 고급 주택과 서민 주택이 공존하는 장충동 
상태바
[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㉙ 고급 주택과 서민 주택이 공존하는 장충동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16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장충동 일대에 주택가가 형성된 건 10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남산 북동쪽 자락의 삼림이 울창한 외진 곳이었지요. 일종의 현충원인 장충단이 있어 신성시되던 지역인데다 금산(禁山) 정책이 시행되던 목멱산 자락이라 소나무 벌채와 토석의 채취는 물론 경작이 금지되고 가옥의 건축 또한 제한되는 국유지였습니다.

이렇듯 한적한 교외였던 장충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경성 확장 과정에서 크게 변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계기는 1919년부터 진행된 장충단의 공원화입니다. 소풍객들의 편의를 위해 장충단으로 연결되는 도로망과 교통망이 정비되기 시작하니까요. 

우선 1920년에 광희동 사거리에서 장충단공원 입구까지 연결되는 도로망, 지금의 장충단로 일부가 열렸습니다. 1925년에는 충무로 방향에서 장충단공원으로 연결되는 동서 방향의 도로, 현재 앰배서더 호텔의 뒷길인 동호로27길이 뚫렸습니다. 그리고 1926년에는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인근인 훈련원에서 장충단공원을 연결하는 전차 노선까지 개통되었습니다.

일본의 건축경향이 반영된 고급 주택가

장충동의 변화를 가져온 두 번째 계기는 주택지 조성입니다. 교통이 편리한 곳에 주택가가 들어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일제 시절 경성의 주택지를 연구한 문헌들을 보면 당시 신문에 실린 주택지 분양 광고나 잡지에 실린 거주 경험담을 인용하곤 합니다. 이때 자주 인용되는 곳이 1927년부터 장충동 일대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소화원 주택지입니다. 장충동의 소화원은 북아현동의 금화장, 후암동의 학강 주택지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경성을 대표하는 3대 주택지였습니다. 

소화원(昭和園)의 원은 유원지를 뜻합니다. 이는 일본의 건축 경향을 반영하는데 교외주택에 별장이나 유원지의 이미지를 부여한 겁니다. 그러니까 북아현동의 금화장의 장은 별장을 의미하는 거죠.

장충동 소화원 주택지 인근의 옛 건물. 사용승인일이 1937년 5월인 목조 건물이다. 사진=강대호

소화원을 연구한 문헌들을 참고하면 소화원 주택지는 장충동1가 38번지 일대와 광희동2가 303번지 일대를 아우릅니다. 지금의 장충단로8길과 장충단로10길 사이 언덕에 자리한 주택가를 일컫지요. 관련 기록을 보면 주택가의 구획을 구릉지의 경사에 따라 조성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축대가 곳곳에 남아 있어 당시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소화원 주택지가 있던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부분 가까운 과거에 지은 건물이나 빌라가 들어서 있었고 아주 오래전에 지은 주택은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둘러보다 보니 간혹 옛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주택이 눈에 띄기도 했습니다.

그 주택들의 지번을 토대로 살펴보니 1930년대에 사용승인된 걸로 나오는 건축물들도 있었고 전산으로는 그 시기를 확인할 수 없는 건축물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일제강점기에 장충동 일대는 또한 경성 교외에 자리한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고급주택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장충동 소화원 주택지의 인근의 축대. 예전엔 주택이 들어섰던 자리지만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인다. 사진=강대호

관련 자료를 보면 1934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관계 회사인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가 직접 장충동 일대를 고급주택지로 개발하게 됩니다. 민간 회사가 개발한 소화원 등과 달리 국책회사가 개발한 만큼 당시의 지배층들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 개발된 의도가 컸습니다. 그래서 개별 필지도 500평에서 800평까지 되는 등 기존 주택지와는 그 크기부터 달랐지요.

해방 후 일본인과 식민지 정부 관계자들이 떠난 집들에는 자연스럽게 한국인 부자들이 살게 됩니다. 그 주택들의 위치는 장충동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장충동과 신당동을 가르는 이면도로인) 동호로20길의 장충동 쪽에 면한 저택들과 건물들이 당시의 터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물론 일제시대에 지은 건축물들은 오늘날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때 정비한 필지는 지금도 그대로인 걸로 보입니다. 넓은 대지에 들어선 장충동 주택가는 한때 서울 고급주택가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 일가들이 장충동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부자들만 장충동에서 터전을 잡은 것은 아닙니다. 동호로20길과 연결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민들의 주거 공간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복잡한지 ‘미로 골목’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골목도 있지요.

서민주택의 흔적, 미로골목과 작은 마을

장충단로, 즉 대로변에서도 서민들이 사는 골목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골목은 장충동 족발 골목에서 광희동 방향의 대로변에 있습니다. 그런데 골목 입구에는 그림이 그려진 벽이 처져 있고 예쁜 디자인의 출입문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골목이 아니라 건물 같기도 한데 출입문과 벽에는 ‘작은 마을’이라고 쓰여 있지요. 

그 출입문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말 그대로 작은 마을이 나옵니다. 작은 마을에는 3층짜리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건물은 낡아 보이지만 파스텔톤의 외벽 덕분에 정겨워 보입니다. 

장충단로 대로변에 자리한 ‘작은 마을’. 골목 입구에 벽이 처져 있고 출입문도 있다. 사진=강대호

골목 안 건물들을 살피며 걷다 보니 장충단로 쪽으로 나가는 다른 출입문이 나왔습니다. 대로변에서 보니 작은 마을 출입구가 두 개였습니다. 두 출입문은 골목 안쪽의 늘어선 집들을 따라 디귿자 모양으로 연결된 거였습니다. 

‘작은 마을’은 어떤 곳일까요? 몇 년 전 장충동의 단골 족발집에서 족발을 먹다가 작은 마을에 관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가게를 창업한 할머니가 그곳에 사셨었다고요. 

그 이야기는 할머니의 뒤를 이어 가게 사장님이 된 손녀분에게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작은 마을에 사셨었고 자기도 어릴 적에 거기에 살았었다고요. 그 집에는 토굴이 있었는데 젓갈과 김치를 보관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2021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장충동 족발 골목의 1세대 창업자 중 한 분이라고 합니다. 손녀분에 의하면 할머니는 원래 이북 음식 전문점으로 시작해 녹두빈대떡 등을 팔다가 손님들 입맛에 맞춘 술안주인 ‘돼지족발’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작은 마을 기록을 찾으려는데 연구 문헌이나 공문서 등은 없었습니다. 다만 월남한 실향민들이 장충동 일대에 벌집촌으로도 불린 좁은 골목에 터를 잡았고 그들이 냉면과 족발 등 고향 음식을 팔았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블로그 등을 보면 작은 마을의 골목을 오래전에 시장이 열렸던 골목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 주택들의 토지와 건축 관련 기록을 살펴보니 대개 1968년에 지어졌습니다. 물론 기록 자체가 분명치 않은 건물들도 있지만 대략 그즈음 지어진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골목 입구에 왜 벽이 처졌고 출입문이 생겼는지 궁금했습니다. 

2022년 2월경 장충동 주민센터 관계자로부터 관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일종의 주민 참여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주민 대표들이 작은 마을에 오래된 건물도 많고 여러모로 취약하니 환경도 개선하고 특색 있게 꾸며보자 제안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2019년 11월에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작은 마을 안쪽 골목. 입구는 두 개의 출입문이 골목길로 연결되는 ㄷ자 형상이다. 3층짜리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진=강대호

아무튼 작은 마을 입구에 담과 출입문을 만들고 거기에 예쁘게 색칠한 건 일종의 미화 사업이었네요. 다른 한편으로는 가림막이기도 했고요. 외부인의 시선을 경계한 것이면서 내부인의 프라이버시를 배려한 걸로도 보입니다. 

지난주에 만난 작은 마을의 한 주민은 골목 입구에 출입문이 생긴 후 골목 안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지나가는 시선들을 피할 수 있어 좋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이 만족해하니 다행입니다.

오래전 화려한 행사를 앞두고 외부 세계에 우리나라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도시 곳곳에 가림막을 치고 가리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용산역 주변처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그랬던 사례가 있었지요. 도시의 가림막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장충동과 장충단이 개발되면서 이 지역에 큰 변화가 오게 되는데요, 무엇보다 이 일대를 지나는 한양도성의 훼철(毁撤: 건물을 부수거나 철거하는 등의 행위)입니다. 다음 주에 그 흔적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