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㉚ 도시개발에 밀려 사라진 한양도성 성곽과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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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㉚ 도시개발에 밀려 사라진 한양도성 성곽과 성문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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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장충동의 일부 주택가는 성곽 마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양도성 가까이에 들어선 마을을 그렇게 부른다면요. 하지만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장충동 일대에서 성곽의 흔적은 알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헐린 후 축대나 담장으로 사용되거나 그냥 땅속에 묻혀 버렸으니까요.

한양도성이 헐리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07년 일본 황태자(히로히토의 아버지인 요시히토)의 한양 방문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내각령 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구성했고, 결국 성벽처리위원회의 주도하에 숭례문 주변 성벽은 철거되었습니다. 

한양도성이 헐리게 된 첫 계기는 日 황태자의 방문

이후 한양도성의 성문들과 성곽은 경성 확장에 따른 도시계획의 방향과 그 운명을 함께 하게 됩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1920년대 ‘경성시구개수계획’을 통해 경성을 격자형 도시로 만들면서 도로와 교통을 정비했습니다. 경성에서 도시구조의 변화는 한양도성의 성곽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습니다. 특히 경성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도로망 건설과 전차 노선 부설을 위해 성문과 성곽이 헐린 곳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을 보면, 1914년에 서소문인 소의문이 철거됐고, 1915년에 서대문인 돈의문이 철거됐습니다. 1925년에는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인) 경성운동장 건립을 위해 흥인지문에서 광희문 구간 성벽을 허물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장충동 한 주택가 골목. 훼손된 한양도성의 성곽의 돌들을 이용해 담장과 축대를 쌓았다. 사진=강대호

주택지 개발 또한 한양도성 훼철의 주요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광희문 남측 성곽을 따라 개발된 장충동 일대입니다. 이 일대의 변화에 대해 역사, 도시계획, 건축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한 문헌들이 있습니다. 

그 문헌들을 참고하면 1910년대 아직 개발되기 전 장충동은 농지와 국유지가 대부분입니다. 이 시기 광희문 남쪽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은 장충동과 신당동을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했습니다. 장충동에서 신당동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해서만 갈 수 있었지요. 

그런데 주택지로 개발되는 1920년대 후반 장충동 일대는 지목이 ‘전’에서 ‘대’로 대거 바뀌게 됩니다. 이 시기에 광희문 남쪽 성곽 일부도 허물어지는데 허문 자리는 도로가 되거나 지목이 대지로 바뀌게도 됩니다. 동호로의 일부도 1929년에 개설됩니다. 덕분에 신당동은 (도심과 연결망이 좋은) 장충동과 연결되며 1930년대부터 전원주택지로 개발됩니다.

하지만 1940년대에 장충동 일대는 그나마 남아있던 성벽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는 주택들이 들어서거나 도로로 편입됩니다. 이제 장충동과 신당동을 막고 있는 성벽이 사라져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이웃 동네가 되었습니다. 장충단로8길과 동호로20길 일대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한양도성 훼철과 관련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과거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1923년 3월 동아일보에 ‘경성부 도시연구회’에서 경성 개발을 위해 도성을 허물어 주택지나 도로를 만들고, 철거 때 나온 석재들을 그 공사에 자재로 쓰자고 제안했다는 기사가 실린 겁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양도성은 “도시 발전에 대한 교통 등 여러 가지 방면에 방해가 되는” 구조물일 뿐이었습니다. 

도시연구회는 1921년에 설립된 단체로 경성부와 밀접한 행보를 보입니다. 당시 신문 기사들을 참고하면 경성부 정책에 힘을 보태는 한편 건축 규제 완화 등 사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례가 많았습니다. 평양 등 다른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습니다.

장충동 주택가의 한양도성 성곽 멸실구간 안내 표지판. 사진=강대호

도시 발전에 방해가 되는 구조물로 인식

장충단로8길의 한 골목 입구에는 ‘한양도성 성곽 멸실 구간’을 알리는 팻말이 서 있습니다. 그 뒤로 계단을 따라 축대가 서 있고요. 그런데 다양한 크기의 돌들을 쌓아 올린 이 축대의 모습이 왠지 낯익어 보입니다. 혹시 훼손된 한양도성의 성곽 돌들을 쌓아 올린 건 아닐까요?

계단을 올라 골목에 들어서니 축대가 마치 담장처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축대 위에 빨간 벽돌로 쌓은 담장이 따로 있긴 했지만요. 

빨간 벽돌 담장과 담장 안쪽 집의 모습이 무척 오래돼 보여 건축 관련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사용승인일이 1936년인 건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장충동 일대가 주택지로 한창 개발될 때 지어진 건물이었네요.

바로 인근에는 성곽의 돌들을 축대 삼아 지은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앞을 빌라 건물들이 가리고 있어서 관찰하기 어렵습니다. 길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시 탐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이지요.

동호로20길의 한 저택.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졌다. 사진=강대호

장충동과 신당동 경계를 지나는 동호로20길 주변도 한양도성이 지나던 경로였습니다. 그 흔적을 도로변 저택의 담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때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저택의 담장 아래 축대는 그 상부와 하부의 돌들이 색깔이 다릅니다. 어쩌면 오래전 성곽을 쌓았던 돌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한양도성의 훼철은 일제강점기에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1962년에 자유센터와 (지금의 반얀트리 호텔인) 타워호텔 건립을 위해 그 주변을 지나는 성곽을 철거하고는 돌들을 축대 등으로 사용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여러 방면에도 이용치 않는 장충단으로부터 남산까지의 성벽”을 허물자 제안했던 일제강점기 경성부 도시연구회의 제안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자유센터 뒤편 한양도성이 끊긴 구간. 사진=강대호

동호로20길에서 나와 동호로를 건너 신라면세점 옆 계단을 오르면 한양도성 성곽길이 나옵니다. 거기부터는 도성이 온전해 보입니다. 하지만 신라호텔 구간을 지나면 성곽은 다시 끊겨 버립니다. 그 구간 아래에는 자유센터와 (옛 타워호텔인)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이 있습니다. 

자유센터는 1962년 서울에서 열린 제8회 아세아 민족 반공대회 임시총회를 앞두고 설치가 논의되어 1966년 제12회 아주반공연맹대회(亞洲反共聯盟大會)를 위한 시설로 지어졌습니다. 각종 반공 관련 회의와 국제행사를 펼치려는 목적이었죠. 지금은 과거의 반공협회를 계승한 자유총연맹이 입주해 있습니다.

1960년대 서울에는 대규모 해외 손님들이 묵을 숙박시설이 부족해 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숙소도 함께 건립했습니다. 이때 세운 17층짜리 숙소 건물은 위 행사 이후 (지금의 한국관광공사인) 국제관광공사가 인수해 90개 객실 규모의 호텔로 개축하고 타워호텔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민간 사업자에게 넘어가게 되지만요.

반공이 그 어떤 가치보다 위에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진행된 국가사업이었으니 남산자락 깊은 곳에 자리한 문화유산을 허무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었겠지요. 공사 전 이 일대는 대한제국 시절에 설치한 장충단 영역에 속하는 국유지였습니다. 

그렇게 허문 성곽의 흔적은 자유센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습니다. 본관 입구의 축대를 쌓는 돌로 썼으니까요. 그리고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곳에 있지만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뒤편 축대를 쌓는 데에도 썼다고 합니다.

자유센터 입구의 축대. 한양도성 성곽의 돌들을 이용해 축대를 쌓았다. 사진=강대호

광희문에 가면 성문과 짧은 성곽 구간을 볼 수 있습니다. 도성이 허물어진 자리에 주택들이 꽉 들어서서 완벽하게 복원할 수는 없었겠지만, 옛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도록 꾸며놨습니다. 그런 광희문은 사실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닙니다. 원래는 바로 옆을 지나는 퇴계로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1975년에 해체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겁니다.

광희문 사례를 보더라도 문화재는 후손들에게 큰 선물이면서 고민을 안겨주는 거 같습니다. 보존과 복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쩌면 일제강점기의 도시연구회와 같은 관점으로, 그러니까 도시 발전에 방해물이 된다는 시각으로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지 않을까요.

다가오는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입니다. 다음 글에서 전쟁의 아픈 산물인 국립서울현충원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광희문과 성곽. 바로 옆 퇴계로 중앙에 자리했었지만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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