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㉘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 제단, 장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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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㉘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 제단, 장충단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0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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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한국전쟁 후 고향을 떠난 이들은 서울로 몰려들었습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번듯한 집을 얻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빈 땅에다 직접 집을 짓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면 산자락이나 개천가는 물론 ‘장충단공원’ 같은 국유지에다 삶의 터전을 일구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이들 땅에 허가받지 않고 지은 집들을 ‘무허가주택 철거’ 혹은 ‘불량주택 일소’라는 구호 아래에 헐어버리곤 했습니다. 1959년 5월 31일 조선일보에 실린 ‘장충동 바라크 철거’라는 기사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사는 “서울 시내 중구 장충단공원 내에 있는 약 190세대의 바라크를 철거했다"고 밝힙니다. 장충동 철거민들이 망원동 하천가의 난민 농장으로 쫓겨난 후 장충단공원 일대는 공원과 체육관, 그리고 호텔 등으로 정비되며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장충단, 명성황후 시해사건 희생자 위한 추모 제단

그런데 공원 이름과 인근 동네 지명의 유래가 된 장충단(奬忠壇)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충성을 장려하기 위한 제단’이라는 뜻을 가진 장충단은 대한제국 시절에 만든 국가 시설이었습니다.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에 고종의 명으로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장충단은 원래 순국한 군인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현충원이었습니다.

장충단공원 입구의 ‘장충단’ 비석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비석 전면의 ‘장충단’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뒷면의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썼습니다.

장충단공원은 현재 동국대와 신라호텔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성 당시 장충단 부지는 남산 동북쪽 자락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장충단공원뿐 아니라 국립극장, 반얀트리 호텔(옛 타워호텔), 남산 자유센터, 그리고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지요.

1900년에 완공된 장충단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1908년까지만 제사가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1909년 가을 제사까지 지냈다고 기록한 논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자 장충단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면서 장충단의 의미가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식민 통치가 시작되며 장충단 시설들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됩니다. 비석도 뽑혀 버렸지요.

특히, 1919년 4월 장충단에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나오게 됩니다. 삼일운동 직후라 식민지 백성들을 위무하고 국가의 상징이었던 곳을 파괴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산자락이라 수목이 울창했던 장충단에는 1920년대 초부터 공원 시설이 들어서며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새로 닦은 산책로가 15리, 운동장이 2곳, 활쏘기 터가 1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공중화장실도 설치했다고 하네요. 

공원을 조성하며 훼손되기 시작한 장충단은 한 사찰이 들어서며 원래의 목적은 물론 모습도 크게 달라집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불교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단 자리에 세운 겁니다.

1939년 박문사 본당. 사진 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사찰 이름의 ‘박문’은 이등박문(伊藤博文), 즉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입니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했습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박문사 설립 목적은 “조선 초대 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 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이 ‘정신적 결합’을 이상한 방법으로 실천했습니다.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가져다 썼습니다. 심지어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 내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박문사 본당은 화재로 전소되었고, 6·25전쟁으로 부속 건물도 파괴되었지요. 대한민국 정부는 그 자리에 해외 국빈을 위한 숙소인 ‘영빈관’을 건축하게 됩니다. 최초 계획은 1958년에 세웠고, 실제 건축은 1964년에 시작해 1967년에 완공했습니다. ‘영빈관’은 전통 한옥 양식의 고급 호텔이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운영하던 영빈관은 경영난에 빠졌고 결국 민간 기업에 넘기게 됩니다. 1973년 국세청은 영빈관과 인근 국유림을 공매에 내놓았습니다. 공매 대상은 모두 국유 재산으로 연건평 1097평의 영빈관 건물과 중구 장충동2가 임야 2만7600평, 그리고 집기와 비품류는 물론 관상수 4만여 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934년 흥화문(왼쪽)과 박문사(오른쪽 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박문사의 정문으로 썼다. 박문사의 위치는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다. 사진 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신라호텔의 유래

공개입찰을 통한 공매는 삼성그룹에 낙찰되었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신라호텔입니다. 그러니까 신라호텔은 대한제국 시절 현충원이었던 장충단 터에 들어선 호텔인 거죠. 

신라호텔 또한 경희궁에서 옮겨온 흥화문을, 즉 박문사가 정문으로 사용했던 그 문을 한동안 호텔 정문으로 사용했습니다. 흥화문을 경희궁의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은 1988년이고, 그 이후 신라호텔은 흥화문을 본뜬 문을 만들어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현판에는 ‘영빈관’이라 쓰여 있지요.

글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장충단은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대한제국 시절에 만든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 설립 이후에도 장충단을 전사자를 위한 추모 시절로 이용했던 시기가 잠시 있었습니다. 

해방 후 두 개의 정부로 나뉜 한반도에는 국지 분쟁이 잦았습니다. 접경 지역과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크고 잦은 전투가 있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요. 당시 신문 기사들에 따르면 남한 정부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전사자들의 영현을 서울 장충사(奬忠詞)에 통합 안치했다고 합니다. 국립현충원 자료에도 장충사에 전사자들을 안치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호텔 입구. 예전에 정문으로 썼던 흥화문을 본뜬 건축물을 정문으로 쓰고 있다. 현판에 ‘영빈관’이라 쓰여 있다. 사진=강대호

이 문헌들로 유추하면 장충사(奬忠詞)는 장충단(奬忠壇)에 있던 시설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6·25전쟁이 발발했고, 정전 이후인 1956년 동작동에 국군묘지가 들어서게 됩니다. 국군묘지는 1965년에 국립묘지로, 2005년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국립현충원의 역사가 장충단에서 시작한 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작동의 국립서울현충원에 관해서는 다룰 소재가 많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전기념일 즈음에 따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해방 후 장충단 영역은 미 군정 귀속 재산, 즉 적산이 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원이었던 이유 등으로 국유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만약 적산이 되었다면, 많은 적산이 그렇게 처리되었듯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나 기업, 혹은 민간 등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덕분에 장충단공원은 전쟁 난민들에게 터전을 허락할 수 있었고, 비록 잠시였지만 소중한 주거 공간이 되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공원부지라 정비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요.

그런데, 군사정권을 거치며 일부 부지를 공원에서 해제해 호텔과 자유센터 등을 건축하고는 국가가 직접 운영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그 시설들이 민간 기업으로 넘어가 버렸고요. 이렇듯 장충단 영역은 쪼개져 국립극장과 자유센터가, 그리고 타워호텔과 신라호텔 등이 들어섰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장충단의 유일한 흔적은 장충단공원의 ‘장충단’ 비석입니다. 그렇다고 원래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식민지 시절에 뽑혔던 비석을 해방 후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웠지만,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섰으니까요. 그래서 비석은 다시 뽑혔고,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겁니다. 

장충단비의 유랑은 어쩌면 세월이 흐르며 변해온 장충단의 위상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음 주에는 장충동에서 볼 수 있는 다소 이채로운 주택가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장충단공원 입구. 장충단 영역은 공원은 물론 신라호텔, 자유센터, 타워호텔, 그리고 국립극장 일대를 아울렀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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