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㉜ 아이스케키 소년과 남산 약수터, 에어컨없던 그때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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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㉜ 아이스케키 소년과 남산 약수터, 에어컨없던 그때 여름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0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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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장마가 끝나니 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해가 갈수록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은 당장 몸에 와닿는 열기 때문만은 아닐 텐데요. 생각해보면 에어컨 없어도 선풍기만으로 여름을 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과거 신문 기사에서 소개한 오래전 서울 시민들의 여름나기를 엿보려 합니다.

예전에도 여름이면 유명 관광지로 피서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과거 신문들을 보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여름철이면 ‘대천’이나 ‘부산’으로 가는 ‘피서 열차’를 편성했다는 기사를 매년 접할 수 있고, 1980년대와 90년대 들어서는 전국의 주요 해수욕장과 계곡으로 가는 관광버스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피서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의 피서법으로 여름을 즐긴 것으로 보입니다. 동아일보 1973년 7월 28일 ‘흥청대는 피서 경기 짜증스런 도시 서민, 폭서철의 명암을 살펴본다’라는 기사에서 당시 서민들의 여름나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사는 “피서를 가지 못하는 도시 서민들의 더위를 이기는 이색 세태”를 소개합니다. “더위를 피해 비원 앞이나 여의도 광장으로 뛰쳐나온 시민들”, “약수터가 있는 남산과 삼청공원 돗자리 장수들”, “한남동 계곡에 포장 칸막이를 한 야외 목욕탕” 등 다양한 여름 풍경을 소개하고 있지요. 

이 기사에서 언급한 지명의 변화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 비원으로 부르던 곳은 창덕궁이 되었고, 여의도 광장은 여의도 공원이 되었습니다. 트렌디한 한남동의 지금 모습은 계곡물이 흐르던 옛 시절을 상상할 수 없게 합니다. 

또한 “여의도 순환도로 버드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깐 노인들”, “우이동계곡의 탁족객들”, “세검정 유원지에 삼계탕 먹으러 나온 가족들”, 그리고 한강 다리는 물론 육교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는 시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름을 견디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계속해서 “무엇보다 무더위로 한몫 버는 것은 얼음 장수와 음료수 장수”라며 “광화문, 시민회관 앞, 화신 앞” 등지의 보리차 행상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택시 기사와 행인들을 상대로 시원한 냉차를 판매했습니다. 경쟁이 심했는지 행상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고 기사는 전합니다.

영화 '아이스케끼'의 한 장면

여름철이 되자 얼음 값이 많이 올랐다는 소식도 전합니다. 얼음 값이 평소보다 다섯 배나 올랐지만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배달은커녕 직접 찾아가도 수박에 넣을 만큼”만 구할 수 있었다는 어느 시민의 경험담에서 당시 여름 경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 여름철 도심에서 냉차 장수만큼 많이 볼 수 있었던 상인은 어쩌면 아이스케키 파는 소년일지도 모릅니다. 

아이스케키는 막대 얼음과자를 말합니다. 지금과 같은 빙과류 산업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자리 잡았습니다. 그전에는 소규모 빙과류 업체들이 구축한 구멍가게 유통망이나 ‘아이스케키 소년’을 이용한 행상이 대세였다고 합니다. 

‘아이스케키 소년’들은 아이스케키가 가득 든 통을 어깨에 메고 거리에 나가 “아이스케키”를 외치며 팔고 다녔습니다. 조선일보 1963년 9월 5일 ‘한철 벌이 여름 결산’ 기사에 ‘아이스케키 소년’과 관련한 이모저모를 다뤘습니다.

기사는 아이스케키 소년들을 “여름이 되면 우르르 나왔다가 여름이 지나면 자취를 감추는 인간 후조(候鳥)”라고 소개합니다. 인간 철새로 묘사된 아이스케키 소년들은 12세에서 16,7세이며 서울에만 약 1500명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1963년 9월 5일 조선일보에 실린 아이스케키 소년 관련 기사. 사진= 조선일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어엿한 개인사업자, 아이스케키 소년

서울뉴욕, 고려당, 삼강유지, 한미당 등 크고 작은 빙과류 회사의 수십 개 대리점에 속한 소년들은 어엿한 ‘개인사업자’였습니다. 그들은 대리점에 500원의 계약금을 걸고 아이스케키를 팔고 남은 이윤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맑고 더운 날에는 장사가 잘되었겠지만, 비 오는 날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비가 내려도 아이스케키 소년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비닐우산을 팔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 없다면 지금은 가까운 편의점을 찾으면 되지만 과거에는 잠시 비를 피하고 있으면 해결되었습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 비닐우산을 파는 소년들이 나타나곤 했으니까요. 

그들은 대나무 살에 하늘색 얇은 비닐을 덧댄 우산을 한 아름 안고 다녔지요. 소년들이 속한 빙과류 대리점에는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비닐우산을 갖추고 있었다고 기사는 전합니다. 

날씨에 개의치 않는 ‘아이스케키 소년’들의 모습에서 청소년까지 나서 경제활동에 나서야 했던 과거의 가난이 읽히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가난 탈출을 위해 뭐라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모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산은 서울의 랜드마크입니다. 남산을 상징하는 서울타워는 웬만한 서울 도심에서도 다 보이고, 남산에 오르면 서울 도심을 거의 조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서울타워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은 거대 도시 서울을 확인할 수 있는 장관이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남산은 숲이 울창해 보호와 관리가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동아일보 1959년 7월 30일 ‘납량점경(納涼点景), 남산’ 기사에서 지금과 다른 남산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기사는 “옛날에 호랑이가 나왔다던 곳에 (중략) 불고기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며 남산골 약수터의 모습을 그립니다. 남산 약수터는 “예전부터 가난한 월급쟁이들이 소주병을 들고 피서라고 찾아든 곳”이라고 소개합니다.

남산 팔각정. 사진=강대호

여름이면 '노천 빠'가 됐던 남산 약수터

기사는 계속해서 남산 약수터가 “술은 물론 불고기와 영계백숙”을 파는 '노천 빠'가 된 모습을 소개하며 서민층의 오후 피서지로 적당하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 이런 신기한 곳이 있어 다행”이라는 소감으로 기사를 마무리합니다. 

만약 오늘날 남산이 ‘노천 빠’가 된 모습이라면 어떤 취지의 기사가 올라왔을까요? 이렇듯 도심 속 유원지 남산 일대에는 노점상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계곡이나 약수터 입구에 돗자리를 깔고 음료와 음식을 팔았지요. 남산 도로변에 그늘이 많아 여름철에는 택시 기사들에게 휴식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81년 7월 23일의 '택시 피서, 손님도 없고 쉬어나 가자' 기사에 그런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울 남산 순환도로 등 숲 그늘에 오후 3~4시의 한창 더위에 택시 피서객이 줄을 잇는다”고요. 손님이 뜸한 시간에 연료도 아낄 참 쉬어가는 택시 기사들을 위해 동전을 바꿔주는 상인들이 냉 보리차 한 잔에 50원씩 받는 모습도 이 기사는 전합니다.

남산에 올라 보니 위에서 언급한 모습들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듯합니다. 다만 팔각정과 산책로 등 남산의 숲 그늘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시민이 찾아드는 건 여전해 보입니다.

남산에서 내려와 광화문으로 향하니 물놀이장이 맞이합니다.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에 조성한 물놀이장이지요. 아이들은 물놀이에 정신없지만,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구색만 갖춘 그늘에서 힘든 여름의 하루를 보내는 듯 보였습니다. 돌바닥에 들어선 광화문 광장은 뜨거운 햇볕 못지않게 바닥에서 올라오는 복사열로 호흡이 가쁠 정도이니까요. 

그래도 아무튼, 아무리 더워도 여름에는 물놀이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 혹시, 강수욕장이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바다에 해수욕장이 있다면 강에는 강수욕장이 있었습니다. 물론 한강에도 있었지요. 다음 글에서 그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물놀이장.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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