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62) 창신동 채석장 마을과 봉제공장, 이주 노동자 커뮤니티
상태바
[도시탐험, 서울 이야기](62) 창신동 채석장 마을과 봉제공장, 이주 노동자 커뮤니티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3.03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종로구 창신동은 종로6가에서 흥인지문, 즉 동대문을 지나자마자 나오는 행정구역입니다. 한양도성이 헐리지 않았을 때는 성문 밖 첫 동네였습니다. 

조선시대에 흥인지문 바깥 지역은 한성부 동부의 성 밖 행정구역인 인창방과 숭신방에 속했습니다. 창신동이라는 지명은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행정구역이 조정될 때 인창방과 숭신방에서 한 자씩 따온 겁니다. 창신동 바로 옆 동네인 숭인동도 마찬가지입니다. 

1943년 경성에 구제(區制)를 도입했을 때 창신동은 동대문구에 속했었습니다. 1975년에는 종로구에 편입되었고요. 이때부터 흥인지문은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속한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오랜 서민 거주지 창신동

‘저층 고밀도 주거지’라는 개념은 창신동에 딱 들어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삼 층짜리 다세대주택이나 다가구주택이 촘촘히 들어선 창신동의 골목들은 격자형이 아닌 부정형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더욱 복잡해 보입니다.

이런 창신동의 주거지로서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흥인지문과 가까운 이 동네는 도성을 오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1424년)에는 숭신방과 인창방의 토지를 조사해 집 없는 자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며 창신동 일대의 인구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창신동 주택가. 경사에 적응해 집들을 건축했다. 사진=강대호

창신동은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종로에서 동대문을 빠져나오면 동북쪽으로 함경북도까지 연결되는 관북로가 있었고, 지금의 중랑구를 거쳐 양평을 지나 동해안의 강릉과 평해 방향으로 연결되는 큰길이 있었습니다. 1899년에는 서대문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로 연결되는 노면전차 노선이 생기기도 했고요.

이러한 인구 증가와 교통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이 일대의 상업 발달을 촉진했습니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성저십리의 농민들은 도성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채소를 재배해 종로나 칠패 등의 시장에 공급했습니다. 

특히 현 동대문 상권의 시초인 배오개 시장은 상업의 요지로 발전했고, 1905년에 설립된 광장주식회사는 국내 최고 상가로 번창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동대문 밖 창신동 언덕배기에는 이들 시장의 노동자 등이 사는 서민 주거 공간이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에는 중산층이 살았던 도시형 한옥이 창신동의 평지를 중심으로 많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35년 10월 12일의 '격증하는 대경성의 신가옥 구개월간 이천팔백호' 기사는 창신동과 숭인동에 (도시형 한옥인) 신축 가옥이 많이 생겼다고 전합니다. 이들 도시형 한옥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창신동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창신동의 주거지를 상징하는 건 서민 주거 공간입니다. 해방과 전쟁 후 창신동 일대는 급격한 인구 증가로 판잣집 등 이른바 불량주택이 늘어났습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선거 때면 조건부로 무허가 건물을 양성화한 적도 있었지만, 서울시의 정책은 불량주택을 철거하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판잣집 등 불량주택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창신동의 주택들은 불량주택이 양성화된 후, 혹은 철거된 후 새로 지은 다세대주택이나 다가구주택들이 대부분입니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집들도 있지만 많은 주택이 지은 지 수십 년 넘은 집들입니다. 이런 창신동 주택가에서도 인상적인 동네들이 있습니다. 채석장 절개지 윗동네와 그 아랫동네입니다.

창신동 채석장 절개지 위와 아래에 들어선 집들. 사진=강대호

채석장 절개지에 들어선 창신동 주택가

창신동 주택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돌산이 눈에 띕니다. 그 절벽 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이 돌산은 낙산과 이어지는 자락입니다. 낙산의 지반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제가 식민 통치 기관의 청사를 지을 때 건축 자재로 썼습니다. 그러니까 창신동 주택가의 돌산은 원래 채석장이었습니다.

창신동의 화강암으로 제일 먼저 지은 건물은 1912년의 조선은행입니다. 명동 입구에 있는 화폐박물관이 바로 그 건물입니다. 조선총독부는 원활한 석재 공급을 위해 1924년에 창신동 돌산을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렇게 1925년에 경성역(옛 서울역 청사, 지금의 ‘문화역 서울 284’)을, 1926년에 경성부청(구 서울시청 청사)과 조선총독부(구 중앙청 청사)를 지을 때 건축 자재로 썼습니다. 

창신동 채석장은 해방 이후 미군정이 운영하다 서울시에서 넘겨받았습니다. 하지만 폭발 사고 등으로 채석장은 1961년에 면목동의 용마산으로 이전했습니다. 참고로 용마산 채석장은 1988년에 폐쇄되었고, 나중에 폭포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창신동 채석장 절개지에 축대를 쌓아 지은 집들. 사진=강대호

한편, 창신동의 채석장 주변은 해방 이후 집 없는 이들에 의해 점유되기 시작했는데 채석장이 폐쇄된 후 더욱 가속화된 걸로 보입니다. 그렇게 채석장 절개지 위와 아래에 집들이 들어섰습니다. 절개지는 거의 90도에 가까운 경사라 말 그대로 깎아지른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일대의 주택들은 축대를 쌓는 등 경사에 적응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창신동 채석장 절개지 주변의 주거지를 외부인들은 독특한 개성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절개지가 잘 보이는 장소에 들어선 카페 등은 SNS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서민 동네의 상징이었던 곳이 레트로 감성으로 둔갑해 버렸는데요 주민들이 실제 거주하는 공간을 카페 등 상업 공간이 마치 자기네 매장의 장식 배경으로 전유한 듯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창신동의 한 건물. 봉제공장들이 입주했다. 사진=강대호

봉제산업의 최후방, 그리고 이주 노동자

창신동의 중심인 창신길 인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배달 오토바이들과 외부인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시야게’나 ‘객공’ 같은 단어가 쓰인 간판들입니다. 모두 창신동의 봉제공장과 관련 있습니다. 참고로 ‘시야게’는 마무리 작업을, ‘객공’은 임시로 고용하는 노동자를 말합니다. 봉제공장은 창신동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자료를 종합하면, 1970년대에 창신동 일대에는 3000여 개의 봉제공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000여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창신길 인근에는 ‘창신동 봉제거리 박물관’이 있습니다. 봉제공장들이 들어선 골목 자체가 박물관인데 몇 개의 안내판으로 봉제거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안내판이 차량 등으로 가려져 있어 잘 모르고 간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창신동에서는 또한 이주 노동자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일터나 숙소가 있고 외국 식자재나 음식을 파는 가게도 여럿 있습니다. 특히 네팔 사람이 많은지 지도를 보면 ‘창신동 네팔 음식 거리’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베트남 사람이 많아진 지금은 베트남 쌀국수 식당과 식료품점도 볼 수 있습니다.

외국 식자재 마트가 입주한 창신동의 한 건물.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행사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강대호

한국인의 명절인 설날이 이들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즐거운 휴가였나 봅니다. 연휴 기간에 열린 다양한 행사 포스터들이 창신동 건물 여러 곳에 붙어 있습니다.

이렇듯 창신동은 서울 도심 가까이에 살아야 하는 서민들에게 안식처는 물론 일터를 제공해 왔습니다. 또한 한국인뿐 아니라 많은 이주 노동자들에게도 넉넉한 품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창신동 인근의 동묘와 그 일대에 들어선 벼룩시장에 가보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