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 칼럼니스트] 종로나 청계천 일대를 걷다 보면 높은 차단벽이 처진 공사장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는 헌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세우는 공사 현장입니다. 크고 작은 건물들로 구성된 필지들을 한데 묶어 구역 단위로 개발하고 있는 거죠.
저는 몇 년 전 종로2가 피맛길 뒤편에 재개발을 알리는 차단벽이 처졌을 때 아차 싶었습니다. 피맛길에 늘어선 주점들을 더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아쉬움이 드는 한편으로 그곳이 사라질 줄 예상했으면서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자책이 컸습니다.
그즈음 청계천 일대에는 다양한 재개발 이슈가 있었습니다. 지역 개발 이슈는 그 지역에 살거나 사업체가 있는 이들, 혹은 개발 이익을 바라는 이들의 관심 사항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의 관심을 받기도 합니다.
을지면옥과 을지다방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을지면옥은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이었고 을지다방은 레트로한 분위기와 BTS가 다녀간 곳으로 소문난 명소였습니다. 두 점포 모두 1985년에 문을 연 데다 같은 건물에 입주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건축이 예정된 건물이라 퇴거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때가 2022년 초였습니다.
그래서 두 점포가 문 닫기 전에 방문하려는 이들이 몰렸었습니다. 저도 냉면집과 다방을 방문했었고요. 두 가게는 다른 곳으로 이전해 영업할 예정이었지만 한 장소를 오랜 세월 지켜온 노포가 주는 감성을 느껴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거죠.
외부의 무관심속에 헐려버린 세운상가 주변
하지만 이런 외부인의 관심 없이 헐려버린 곳이 청계천 일대에는 많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이 벌어지고 있는 ‘세운4구역’입니다. 세운상가와 바로 붙어 있는 동네지요.
세운4구역에는 각종 전자제품과 기계, 그리고 그 부속들을 취급하는 점포와 공장이 있었습니다. 2층이나 3층짜리 건물이, 간혹 5층 정도 되는 건물도 있었지만 주로 단층 건물이 복잡한 골목에 들어섰던 곳이었습니다.
1968년에 완공된 세운상가는 한때 서울의 랜드마크였습니다. 덕분에 인근의 상가와 골목의 점포들도 함께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자제품과 컴퓨터용품으로 유명했던 이 지역은 용산에 전자상가가 들어서자 상권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렇게 슬럼화가 진행되다 재개발이 확정되었고 결국 2021년 세운상가 옆 골목들 곳곳에 ‘철거 예정’이라 쓰인 플래카드가 붙게 되었습니다. 저는 2021년 가을과 겨울에 이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습니다. 조만간 사라질 골목들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철거 안내문에는 2021년 11월부터 철거가 시작된다고 공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11월을 앞둔 골목들은 썰렁했습니다. 많은 점포가 문을 닫고 다른 곳으로 이전했으니까요. 셔터가 내려진 점포들마다 뭔가가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엔 그 점포가 옮겨간 곳의 약도와 주소가 정성껏 적혀 있었습니다.
문 닫은 점포들이 늘어선 골목은 어두웠고 버려진 가구나 기계 등으로 복잡했습니다. 하지만 그 골목들에는 아직 문을 연 점포들이 있었습니다. 문을 닫지 못한 점포 주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습니다. 이전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주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골목에서 수십 년 영업을 해왔는데 새로운 장소로 옮겨야 하는 불안감이 보였습니다.
그해 12월에도 세운4구역은 철거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만 11월만 해도 열었던 점포들 모두 문을 닫았고 골목 입구마다 펜스가 처져서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후 다시 찾은 세운4구역은 철거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낮은 건물들과 복잡한 골목들로 복잡했던 동네가 널따란 평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저 밑에 유적이나 유구가 있지 않을까 하고요. 사실 세운상가 입구의 지하에도 인근에서 발굴된 유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종로 일대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상업지구이면서 주거지역이기도 해 당시의 흔적이 땅에 묻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종로 피맛골 뒤편에서도 조선시대의 금속활자가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세운4구역은 '4대문안 문화유적 보존방안'과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발굴 조사 대상입니다. 2023년 3월에 공개된 서울시 공문에 따르면, 2022년 12월부터 세운4구역의 지표면에 대한 시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때 유구가 확인되어 정밀 조사가 예정되어 있다고 이 공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초에도 세운4구역 일대는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드러난 바닥은 누가 봐도 옛 구조물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앙의 석축과 돌 구조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도 외벽처럼 보이는데 돌로 외벽을 쌓은 건축물이라면 뭔가 규모 있는 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위 공문에 따르면 근대 시기 건물지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세운4구역 곳곳에 옛 건축물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돌담도 보이고 그 안에 크고 작은 건물의 흔적이 보입니다. 돌담의 흔적을 이어보면 건물지 사이로 난 길이 보이고 건물지 안에는 기둥을 세웠던 기단의 자취도 보입니다.
적어도 수십 년간 저 구조물들 위를 흙으로 덮고 크고 작은 점포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 돌들을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 기초 용도로 썼을 수도 있고요.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다시 가보니 12월 초와 달리 세운4구역 곳곳에 파란 비닐이 처져 있었습니다. 여전히 발굴 작업이 이뤄지는 걸로 보였고요. 서울시 측에 따르면 문화재와 관련된 세 단체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세운4구역은 발굴 조사가 종료된 후에나 예정된 공사가 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운4구역 발굴조사의 결말은
그렇게 되면 저 유구들은 어떻게 될까요? 만약 의미 있는 매장문화재라면 법령에 따른 보존 조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방법은 크게 세 종류입니다. 현지보존, 이전보존, 기록보존.
‘현지보존’은 문화재의 전부 또는 일부를 발굴 전 상태로 다시 메워 보존하거나 외부에 노출해서 보존하는 것을 말하고, ‘이전보존’은 문화재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다른 장소로 이전하거나 박물관, 전시관 등으로 이전해 보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록보존’은 발굴 조사 결과를 기록물로 보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각 인근의 한 건물 지하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는데요, 바로 ‘현지보존’ 방식의 한 사례입니다. 서울시 자료를 종합하면, 재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매장문화재 일부를 최대한 ‘원 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이른바 ‘공평동 룰’을 적용한 첫 사례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강북 도심은 아무 데나 파 보아도 유구나 유물이 나올 거 같습니다. 오래도록 쌓여온 역사의 지층 위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살았던 흔적도 지층 속에 묻혀 있다가 먼 훗날에 발굴될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후손들이 알게 될 지금의 모습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2024년에는 서울의 오랜 지층 속에 묻히고 쌓여 있던 이야기들을 더욱 열심히 발굴하는 한 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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