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월이 되었으니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에서 한때 서울의 중심이었던 종로 일대를 여러 회에 걸쳐 다루려 합니다. 종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큰길이었고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종로는 서울의 중심지로 계획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한양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수도로 건설되며 계획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가 조화된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도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자연 지형을 잘 이용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을 북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사면에 세웠고 그 아래에 종묘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한양을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따라 성곽을 쌓고 도성 출입을 위한 네 군데의 대문과 소문을 냈습니다.
도성 안에는 오늘날의 세종로, 종로, 돈화문로, 남대문로 등 주요 간선 도로, 즉 대로를 건설했습니다. 그 외 중로 급의 길들은 주로 물길을 따라 냈습니다. 한양 도심에는 개천, 즉 청계천이 있었는데 내사산 등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이는 하천이었습니다. 이들 크고 작은 물길 옆으로 길이 났던 거죠.
그리고 길가에는 도심이 형성되었습니다. 대로변에는 주요 기관들이 배치되었고 중로 급 도로변에는 주거지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길 뒤편의 골목에도 주거지가 자연스럽게 들어섰습니다.
현 율곡로가 최고의 주거지인 까닭
도성 내 최고의 주거지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선상의 지역이었습니다. 즉 북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사면에 위치하는 동네로 현 율곡로 일대를 말합니다.
이 지역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입니다. 그래서 햇볕이 잘 들어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되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남산이 보이는 등 전망도 좋아 권문세가들이 모인 최고의 주거지였습니다. 오늘날의 북촌을 말합니다.
반면 권문세가에 속하지 못한 관료들이나 양반들은 남산 기슭인 남촌 일대에 거주했습니다. 북촌과 비교해 음지이지만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해 주거지로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남산동, 필동,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을 말합니다.
이렇듯 북촌과 남촌은 성격이 다른 주거지였습니다. 그리고 두 지역 사이에는 한양은 물론 조선을 대표하는 상업 지역이 들어섰습니다. 오늘날의 종로와 을지로1가에서 4가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에 상가와 시장 등이 집중된 공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 지역에는 상점뿐 아니라 상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의 주거도 혼합된 걸로 보입니다. 육의전을 운영하는 거상들의 집도 있었겠지만, 서민들의 가옥들도 혼재된 마을을 이루어 북촌과 남촌 못지않게 규모가 있는 주거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양에서 가장 저지대였기 때문에 청계천에 인접한 뒷골목들은 배수가 잘 안되어 비만 오면 진흙 구덩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름철에는 청계천의 악취가 퍼져 주거환경으로는 좋은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뒷골목 서민들의 주거 공간에는 빈곤한 선비들의 가옥도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고개가 이 지역의 특성을 보여주는 지명입니다. '남산 앞에 진고개가 있다. 땅이 낮고 협소하여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 습하고 진흙길이 되는 일이 많아 이 길을 가는 사람이 곤란을 겪었으므로 이 마을을 진고개라 부른다'는 옛 기록이 있습니다.
종로가 한양과 상업의 중심이 된 건 ‘시전행랑(市廛行廊)’이 들어선 덕분입니다. 시전은 상설 점포를 의미하고 행랑은 문간 옆에 있는 방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쓰인 행랑은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점포를 길게 지어 상인에게 빌려준 점포를 일컫습니다. 공랑(公廊)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종로 일대에 들어선 시전행랑은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설치한 일종의 국영 상가를 의미합니다. 시전행랑은 창덕궁의 대문인 돈화문 앞길과 운종가, 즉 오늘날의 종로1가에서 종묘 앞까지, 그리고 남대문로 일대에 있었습니다.
돈화문 앞길의 시전행랑에서는 주로 관청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했고, 운종가에서는 백성들의 생필품을 조달했다고 합니다. 즉 종로의 시전행랑은 일종의 상설 상가로 조선시대에 도시 상업 기능의 중추였습니다.
관련 문헌을 종합하면, 시전행랑은 여러 차례에 걸쳐 2천여 칸 규모로 건축되었습니다. 돈화문로나 남대문로, 그리고 종로 등 대로변에 설치되었고 그 뒤편으로는 작은 길이 형성되었습니다. 대로변을 따라 형성된 시전행랑은 주거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성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종로 일대에 건물들이 들어선 모양은 과거 시전행랑이 늘어선 것의 연장선인 듯도 합니다. 과거 종로 대로변은 비교적 정형화된 구획이 형성되었고 뒤편의 골목은 물길과 지형에 따라 불규칙한 구획이 형성되었습니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세운상가 일대의 골목의 모양도 그렇습니다. 큰 도로 뒤편은 물길과 지형에 따라 불규칙한 구획이 형성되는 한양 도시 구성의 원리를 지금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삽입한 세운4구역 발굴 현장 사진을 보면 종로의 대로 뒤편의 길이 자연 지형을 이용한 듯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서 방향의 연결을 중시한 도로 체계
조선시대 한양의 도로 체계는 동서 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했습니다. 종로가 그렇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새로운 가로체계 방사형 가로 계획, 도로의 직선화, 격자형 가로망 등이 서울에 도입됩니다.
이때 서울 도심의 기존 동서 방향의 가로들을 직선화하고 확대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종로에서 남북방향의 연결을 위한 새로운 가로를 계획했습니다. 오늘날의 우정국로, 종로 남측 돈화문로, 창경궁로, 삼일로 등이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습니다. 또한 황금정길, 오늘날의 을지로도 가로 폭이 확대되고 직선화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종로, 특히 세운상가 일대는 소개공지대로 조성되었습니다. 소개공지대는 공습으로 시가지에 불이 났을 때 그것이 옆으로 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조성한 대규모의 공터를 말합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접어들며 일본의 주요 도시가 폭격받고, 1944년에는 제주도와 부산 근처에 미군기가 나타나자 1945년 3월 '한반도 내의 도시소개대망'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경성 내에 5개의 소개공지대를 고시했습니다. 그중 한 곳이 오늘날의 세운상가 일대입니다.
해방을 앞두고 소개공지대에 속한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해방 후 이 빈터에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습니다. 전쟁 후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런 공지에 들어선 서민들의 주거 공간을 헐고 들어선 건물이 세운상가입니다. 다음 주에는 세운상가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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