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종로는 종로1가 사거리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바뀝니다. 광화문통에서 고층 빌딩이 이어져 오다 종로1가 사거리를 지나면 상대적으로 낮고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 나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대로와 가까운 인사동 일대는 재개발 구역이라 옛 건축물들이 싹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렇게 종로2가 사거리까지 가서 인사동 방향을 바라보면 존재감 뚜렷한 건물이 하나 나옵니다. 낙원악기상가로 알려진 낙원빌딩입니다. 이 건물을 유심히 바라봤다면 특이한 구석이 있는 걸 발견했을 겁니다. 건물 아래로 차량이 지나다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느 건물이라면 도로변에 들어섰을 텐데 낙원상가는 도로 위에다 건축했습니다. 건물 1층이 있을법한 자리에 도로가 지나고 건널목이 놓였는가 하면 필로티 구조의 주차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의 지분을 소유한 법인이나 개인들은 토지세가 아닌 도로 점용료를 낸다고 합니다.
참고로 예전에 다뤘던 ‘서소문 아파트’는 하천을 복개하고 들어선 건물이라 소유주는 토지세 대신 하천 점용료를 냅니다.
낙원빌딩 주변을 둘러보면 건물 외벽에 다양한 간판이 걸린 걸 알 수 있습니다. 악기 상가와 영화관은 물론 전통시장과 아파트가 함께 있는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주상복합건물입니다. 그런데 외형만 보면 상가 건물과 아파트 건물이 다른 건물로 보이지만 구조상 하나의 건물입니다.
그런 낙원빌딩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흔적이 있습니다. 아파트 쪽 입구 외벽에 걸린 ‘1967년 10월’이라 쓰인 머릿돌과 ‘낙원삘딍’이라 쓰인 명판이 그것입니다. 지금은 낯선 외래어 표기법으로 쓰인 명판이 내걸린 낙원빌딩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서울미래유산’입니다.
'없는 악기가 없는' 상가
사람들에게 낙원빌딩은 악기 상가로 유명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거의 모든 악기를 취급하고 있고, 수리나 대여 등 악기 관련한 다양한 업종이 모여 있습니다.
낙원악기상가에 원래부터 악기상이 모인 건 아니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창덕궁 입구와 종로3가사거리를 잇는 돈화문로에 국악기 관련 점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돈화문로를 ‘국악로’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탑골공원 인근에 악기 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탑골공원을 둘러싼 파고다 아케이드에도 악기상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낙원빌딩 인근 무허가 건축물들이 철거되었고 1980년대 초에는 파고다 아케이드까지 철거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인근의 악기상들이 낙원빌딩으로 모이게 되었던 거죠.
낙원악기상가의 모습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1980년대에는 밤무대 뮤지션들이 팀을 꾸리고 일터를 찾는 곳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교회가 방송 시설과 밴드를 꾸리기 시작한 거에도 낙원상가의 공이 큽니다. 2000년대부터는 입시에서 실용음악 전공의 인기가 높아진 영향에 힘입기도 했습니다.
악기 상가 2층에는 기타와 우쿨렐레처럼 처음 악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악기부터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현악기, 색소폰 같은 관악기 가게가 모여 있습니다. 3층은 좀 더 넓은 공간의 점포가 많습니다. 그래서 드럼처럼 상대적으로 부피가 큰 악기, 그리고 전자악기나 음향기기를 파는 곳이 많습니다.
선대 때부터 관악기 매장을 운영해 왔다는 한 상인은 MBC의 <나 혼자 산다>에 ‘코드쿤스트’라는 뮤지션이 낙원상가에서 색소폰을 사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 방송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이 꽤 있다고 했습니다. 낙원빌딩의 악기 매장을 둘러보면 수십 년 넘게 운영해 서울시에서 ‘오래가게’로 지정한 업소를 여럿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실버영화관과 아파트
낙원빌딩에는 극장도 있습니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전 서울에서 갓 개봉한 영화를 보려면 종로로 가야 했습니다. 종로3가의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이 그런 곳이었고 낙원빌딩 4층에 있었던 ‘허리우드극장’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멀티플렉스로 관객들이 쏠린 후 종로의 다른 영화관들처럼 허리우드극장도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한동안은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허리우드 클래식’과 다양성 영화를 개봉하는 ‘서울아트시네마’로 활용되었습니다. 현재는 시니어를 위한 영화관인 ‘실버영화관’과 공연장이나 행사장인 ‘낭만극장’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난 15일에 ‘실버영화관’에는 톰 크루즈의 ‘탑건’이 상영되었고, ‘낭만극장’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한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그래서 극장 로비에는 어르신들로 붐볐습니다. 이번 주 어느 신문에는 허리우드극장이 어르신들의 ‘2000원 아지트’라는 취지의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극장은 낙원빌딩 4층의 야외 공간, 옥상 혹은 테라스에서 연결됩니다. 극장 입구 맞은편에는 ‘낙원아파트’가 솟아 있습니다. 다른 건물이 아니라 낙원빌딩과 한 건물입니다. 6층부터 15층까지 아파트 공간이고, 149세대가 산다고 합니다. 악기 상가나 극장과는 별도의 입구를 사용해 거주자나 배달 등 구체적 용무가 있지 않으면 아파트 구역에 들어가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지하의 전통시장
낙원빌딩 외벽을 유심히 보면 ‘낙원시장’이라 쓰인 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낙원시장은 낙원상가 지하에 있는 전통시장입니다. 건물 주위 곳곳에는 시장으로 내려가는 지하도가 있습니다.
사실 낙원상가 자리는 원래 ‘낙원시장’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일대로를 뚫고 낙원빌딩을 세우느라 시장을 철거했습니다.
낙원빌딩이 자리한 종로구 낙원동 일대는 떡집으로 유명했습니다. 모두 옛 낙원시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면 과거 낙원시장에는 16개의 떡집이 한데 모인 ‘낙원동 떡전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1920년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낙원떡집’과 역시 수십 년 전통의 ‘종로 떡집’ 두 곳 정도만 눈에 띕니다.
한편, 낙원시장이 철거되고 1967년에 낙원빌딩이 들어서자 시장 상인 중 일부는 건물 지하에 조성한 시장에 입주해 오늘에 이릅니다.
낙원빌딩 지하의 시장에는 채소가게는 물론 생선가게와 정육점도 있습니다. 이불 가게와 옷 가게 그리고 그릇 가게까지 있습니다. 규모가 작고 어둡긴 해도 시장 구색은 갖췄습니다. 물론 빈 점포도 많이 보이고, 악기 매장의 창고로 쓰이는 공간 비중이 커 보이긴 하지만요.
도심 속 지하에 있는 전통시장을 주로 찾는 이는 누구일까요. 시장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줄어들기는 했지만 인사동, 낙원동, 익선동 등 인근의 식당들과 주민들이라고 합니다. 채소와 육류, 그리고 건어류 등 취급 품목이 다양한 ‘대지상회’ 주인은 선대부터 60년 가까이 영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상에 시장이 있던 시절부터였다고 하네요.
지하의 낙원시장에는 식당도 여럿 있습니다. 영화와 방송에 나와서 유명해진 국숫집과 착한 식당으로 소문난 곳이 있습니다. 맛집 프로그램에 나와 낙원상가 인근에 분점을 낸 식당도 있습니다. 국숫집 손님 중에는 어르신들이 많아 보입니다. 푸짐한데다 맛도 좋은데 가격까지 저렴합니다.
그러고 보면 낙원빌딩의 허리우드극장과 지하 시장은 물론 인근의 탑골공원과 종로3가 일대에 어르신들이 많이 보입니다. 다음 주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종로2가와 종로3가 일대를 둘러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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