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민의 키워드 일본] '국민총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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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민의 키워드 일본] '국민총소득'
  • 윤경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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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민 칼럼니스트]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일본에 유학을 갔던 한국인 학생들은 반드시 아르바이트를 해야 살 수 있었다.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접시닦이나 신문배달 등 별로 말이 필요 없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1년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며 지내고선 꽤 큰 목돈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그만큼 한일 간 경제 격차가 컸기 때문이었다. 

#1. 필자가 대학생 때 일본어관광통역가이드 자격증을 따고 아르바이트로 일본인 관광객 가이드를 할 때의 일이다. 일본 건설회사에 다닌다는 중년의 남성 관광객 3명을 김포공항에서 마중해 서울 시내 강남의 한 호텔로 안내하는 것이 첫 임무였다. 초보 아르바이트 가이드였기 때문에 베테랑 여성 가이드와 동행하며 보조 역할을 수행했는데,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관광객들을 승합차에 태우고 호텔에 도착했더니 젊고 늘씬한 미녀 3명이 호텔 커피숍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각자 짝을 지어 호텔방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튿날 로비에서 기다리자니 역시 전날의 커플끼리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말로만 듣던 이른바 '기생관광'의 현장이었다.

#2. 필자가 기자 초년병 시절, 그때의 그 충격적 기억을 소재로 일본인 기생관광 실태 취재에 나섰다. 마포의 한 유명 호텔 벨맨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인인 것처럼 위장하고는 하룻밤을 함께 할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요청은 즉각 수락됐다. 카메라기자와 함께 몰래카메라를 장착하고 호텔 커피숍에 도착하니 젊은 여성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종의 '가격 흥정'을 하며 녹취에 성공한 우리는 가격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둘러대며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3. 필자가 도쿄특파원 시절 (2005.2~2008.2) 사무실이 소재한 아카사카 지역에는 한국 '크라브(여성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이 즐비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접대 여성도 모두 한국인인 곳이다. 이곳에서 일하던 한 여성은 울산의 한 은행을 다니다가 다단계에 빠져 빚을 많이 지는 바람에 돈을 벌러 도쿄에 왔다고 했다. 그녀는 1년 간 일하며 1억 원을 모으는 게 목표라고 했다.

#4. 몇 년 전 한국에서 사업을 하던 재일동포 후배가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일본인 여성이 접대하는 곳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제는 일본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다는 얘기다.

#5. 일본의 한 유력신문 기자였던 한 여성은 몇 년 전 한국으로 유학 왔다가 정착했다. 한류 관련 잡지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방송 출연과 강연 등을 하고 있다. NHK는 얼마 전 한 프로그램에서 한국에 취업하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대표적인 일본 관광지 센소지. 사진=연합뉴스

이 같은 현상은 한일 간의 경제력 차이가 좁혀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된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을 비교해 보자. 2021년 기준 일본은 4만 2620달러 한국은 3만 4980달러다. 7000달러 이상 차이 나지만 물가를 따져 보면 거의 차이가 없는 셈이다. 구매력을 감안한 소득은 이미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는 분석도 있다.

1980년 일본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돌파(1만 850달러)했을 때 한국은 1870달러에 불과했다. 한국이 1만 달러에 진입한 것은 1994년으로, 일본보다 14년이 뒤졌다. 일본이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가는데 4년이 걸린 반면 한국은 9년이나 걸렸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주목할 점이 있다. 일본은 하락세에 있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상승세에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1995년 4만 달러대에 진입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3만 달러대로 주저앉았다가 다시 상승, 2012년 5만 달러를 돌파했으나 이를 정점으로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한일간 경재력 격차가 줄어들면서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편이 안내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엔데믹 이후 보복 소비의 일환으로 해외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 5월 해외로 나간 한국인 여행객은 모두 168만 명, 이 중 3분의 1인 52만 명이 일본으로 갔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3분의 1이 한국인이다. 같은 기간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은 18만 명. 엔화 약세의 바람과 더불어 한국의 구매력 강화가 이 같은 역전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최저임금도 이미 한국이 일본을 역전했다. 이 추세라면 한국에 돈 벌러 오는 일본인들이 갈수록 늘어나지 않을까. K팝 열풍으로 한국이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 젊은이들의 한국 유학, 한국 취업도 늘어날 전망이다. 30여 년 만에 풍경이 뒤바뀌고 있다.

 

● 윤경민 칼럼니스트는 YTN에서 도쿄특파원을 역임한 일본통이다. 채널A에서 국제부장, 문화과학부장을 지냈다. 늦깎이 학도로,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덕대 겸임교수로도 활동하며 일본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강의와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은퇴 후 전 세계 20개 도시 한 달씩 살아보기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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