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82년생 김지영’...가족,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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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82년생 김지영’...가족,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는 힘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19.10.3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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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정유미)’이라는 인물을 다룬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이를 돌보고,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특별할 것 없이, 눈뜨면 반복되는 가정주부의 일상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해질녘이면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는 그녀, 아이와 단 둘만 남겨진 세상에서 말을 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영의 삶은 얼핏 보면 그다지 비극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빙의’증상을 제외하곤 지극히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30대 여성일 뿐.

그러나 다른 누군가로 빙의 되는 순간, 그녀는 ‘김지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낸다. 마치 홧병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명치끝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토해낸다. 어쩌면 그것이 희망을 거세당한 채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을 감내해야만 하는 ‘경단녀’(경력단절여성의 줄임말) 지영의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른다. 

친정 엄마가 되어 명절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자신을 위해 시어머니에게 쏟아내는 말들은 결의에 찬 항변에 가깝고, 가족을 위해 미싱을 돌려야만 했던 젊은 시절 엄마(김미경)의 희생을 위로하고 보듬어주는 외할머니로 분한 지영의 모습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병, 그 위태로움을 남편 대현(공유)으로부터 전해 듣는 그녀는 괴로워하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의연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부터 묻는 지영의 모습은 관객의 심장을 되레 아프게 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컷

◆ 영화적이지 않아 더욱 특별한 영화

이 작품은 영화적이지 않다. 감정이 고조되지도 않을 뿐더러 등장 인물간의 갈등도 찾아 볼 수 없다. 그 흔한 악인도 없다. 그저 우리의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스크린으로 옮겨 재배치 해놓았다. 담담한 마음으로 이웃, 혹은 내 주변 누군가의 일상을 마주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특별하다.

길에서 마주치는 누군가의 평범한 삶이 영화가 돼 주는 경험은 자칫 별것 아니라고 간과하고 스치듯 지나갈 무관심에 시선을 멈추게 해준다. ‘일상의 재현’이 주는 무게감은 그래서 결코 가볍지 않다. 

승진에서 누락되는 여성, '시터 이모님'을 구하지 못해 다시 찾아온 사회생활의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몰카에 대한 두려움으로 화장실조차 편히 갈 수 없는 모습, 공공장소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엄마는 어느새 엄마가 아닌 ‘맘충’이 되는 현실, 미래를 걱정해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는 남편들...

이렇게 꽉 막힌 사회적 제도를 누군가는 ‘공기 같은 차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영화는 차별에 무감각해진 사회를 폭로하지도, 비판하지도, 힐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관찰하도록 펼쳐 놓을 뿐. 

◆ 사회적 차별을 감싸주는 ‘가족애’

‘차별’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아들만 챙기는 아버지와 할머니는 차별의 시작이고,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그것은 사회로 확대되고 반복된다. 그러나 지영이 사회로 다시 한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치유의 힘은 가족에게서 비롯된다.

그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남편 대현과 딸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친정엄마, 비로소 그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아버지와 남동생. 이들이 비로소 타자가 아닌 ‘김지영 본인의 입’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원이 된다. 

여성의 적이 남성이 아니듯, 남성의 적도 여성이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누군가에겐 딸이고, 엄마, 아내이고 동생이며 누나, 동료이다. 그녀를 보듬어 주는 건 내 가족을, 하나의 사회 구성원을 품어주는 것이다. 

영화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족애’로 다시 꿈을 찾게 되는 김지영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시종일관 잿빛 현실의 모사(模寫)와도 같았던 작품이 ‘희망’을 품은 건 우리 사회에 바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그것마저 없다면 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이 숨 쉴 수 있는 출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희망’을 꿈꾸는 결말이 영화를 봉합해주는 극적 판타지로서의 설정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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