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갑과 을의 경계 허무는 ’펭수‘의 특급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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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갑과 을의 경계 허무는 ’펭수‘의 특급 매력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0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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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잠깐만 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밤새 펭수 덕질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자이언트 펭TV‘의 열혈 구독자라고 해도 되겠다.

‘이 나이에 참~’ 정신 차리고 보니 헛웃음만 터져 나온다. 펭수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말은 차마 하질 못하겠다.

그런데 위로가 되는 것은 내 나이 즈음 되는, 세상살이가 힘든 어른들이 펭수의 팬을 자처한다는 사실이다.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 덩어리 펭수, 지금 난 ‘펭수홀릭’ 중이다. 

생각해보니 나이 따져가며 나와 유사한 사람들에게 묻어가려는 모양새가 펭수의 유행어 ‘눈치 챙겨’라는 말을 여전히 꼰대 문화 속에서 해석하며 살고 있구나 싶다. ‘눈치껏 행동해야지’라는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펭수는 다르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눈치 챙겨‘를 외친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자유의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한없이 멋진 존재다. 

◆ 어린이용 캐릭터, 어른들에게 위로가 되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성인남녀 233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9 올해의 인물‘에 EBS 연습생 펭수가 방송, 연예부분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놀라운 것은 올해 가장 핫한 트로트 가수 송가인이 2위, 월드스타 BTS가 3위라는 사실이다. 

올해의 인물에 사람 대신 특정 캐릭터가 선정됐던 적이 있었던가. 슈퍼스타가 되고 싶다고 공언했던 그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현실을 목도하고 나니 조금은 어안이 벙벙하다. 

어린이용 캐릭터로 창조된 펭수는 외모와 다르게 허를 찌르는 ’펭언‘(펭수의 명언)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어느새 어른용 캐릭터로 확장됐다. 상처를 주는 존재도, 위안이 되는 존재도 사람이라고 했거늘, 2019년 우리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펭귄 캐릭터에 불과한 펭수에게 위로 받고 있다. 웃픈 현실이다. 

대다수가 늘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을‘의 입장을 살고 있기에 ’제가 갑입니다‘를 외치며 소속사(EBS) 김명중 사장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불러대는 펭수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막힌 가슴을 뻥 뜷어주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펭수의 거침없는 언행은 '눈치보기'가 일상이 된 많은 사람들에게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사진=EBS

갑을 향해 날리는 돌직구는 ’눈치보기‘가 일상이 돼버린 많은 ’을‘들에게 핵폭탄급 카타르시스를 준다. ’눈치 챙겨‘의 언행일치다. 우리 삶이 한없이 가슴 답답한 ’고구마 인생‘의 연속일진데, 펭수는 이럴 때 나타난 ’사이다‘ 같은 존재다. 

조건이 중요해진 세상, 그 조건을 스스로 만들 가능성조차 차단된 세상에서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조차 사치스러워져 버린 2030세대에게 ’난 특별하다‘, ’나 자체가 매력이 있다‘는 펭수의 외침은 마치 마법의 주문 같아 보인다. 외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 같은 믿음마저 든다.

미칠 것 같은 존재의 시시함으로 봉인해버린 ’자존감‘을 세워주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나‘ 자신임을 각인시켜준다. 

◆ 키덜트들의 욕망이 발현된 캐릭터

10살의 넘치는 스웩에 어른의 '갬성'을 장착한, 이 언발란스함이 펭수의 B급 캐릭터를 빛나게 해주는 가장 큰 요인인지도 모른다. 어른이지만 때론 아이가 되고 싶기도 한 많은 키덜트들의 욕망이 제대로 발현되었기에 우리는 펭수의 특A급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글쎄? 

현실에서 할 말 다 하고 살아도 인간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어쩌면 할 말 다하는 펭수는 갑과 을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주변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단지 인형의 탈을 뒤집어쓴, 누군가 기획한 캐릭터라는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실체를 굳이 상기하지 않는 이유는 팍팍한 현실에서 할 말 참으며 목 넘김으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생채기가 위로의 아이콘 펭수로 인해 굳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지만 펭수가 부러운 걸 어쩌지 못하겠다. 한번쯤은 펭수를 벤치마킹한 인생, ’눈치 챙겨‘를 제대로 실현할 날이 내게도 올까. 이런 소심함 만렙인 삶을 버리기 위해 난 지금도 펭수 덕질 중이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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