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한 칼럼] 의사 전문직의 발달 : 약제상이 의사된 사연
상태바
[김장한 칼럼] 의사 전문직의 발달 : 약제상이 의사된 사연
  • 김장한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
  • 승인 2019.09.19 14: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세유럽에는 의사, 약제상 행위 구분돼 있어
영국 청교도혁명, 런던대화재 사건후 약제상 신뢰 커져
로즈 소송 판결로 약제상, 의사면허 없이 일반의사
김장한 울산의대 교수
김장한 울산의대 교수

[김장한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 의사가 수술한 이후에 간호사가 절개된 피부의 일부를 봉합하면, 간호사는 무면허 의료행위의 정범, 이를 지시한 의사는 공범으로 처벌받을 것인가? 의료법 또는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 조치법 위반으로 의견 조회를 받은 사안이다.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조무사라면 어떠한가? 미국에서는 전문 교육을 받은 전문간호사, 군위생병, 산불 진압 소방관은 봉합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답은 법원이 내는 판결일 것이니 답을 언급하는 것이 부적절할 것 같은데, 이야기 하고 싶은 점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무면허 의료행위 처벌 범위가 매우 넓다는 사실이다.

무면허 의료행위 처벌의 역사는

무면허 의료행위 처벌의 역사를 의사 전문직 발달 과정과 의약 분업을 연결해 살펴보고자 한다.

유럽 중세 초기 가톨릭 수도원을 통하여 전수되었던 의학 지식들이 10세기 전후로 발달하기 시작한 대학(university)에서 정규 과정이 되면서 의사 집단이 형성될 정도가 되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 입학 자격에서 귀족에 해당하는 신분적 차별성을 가져야 했고, 졸업을 한 이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지식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집단을 형성하였다.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된 의사들은 의료행위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받고자 했다. 시실리를 포함하여 중부 유럽을 다스렸던 프리드리히 2세는 1231년 이른바 멜피법를 발포했다. 제후들이 최종적으로 법전을 심의하였던 남이탈리아 멜피(Melfi)라는 도시 이름을 따라 명명된 법은 아우구스탈법전(Liber Augustalis)으로도 불리우는데, 프리드리히의 계몽 절대주의와 그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가 수행한 최초의 포괄적이고 국가적인 규범화 시도였다.

멜피법에 의하면, 대학을 졸업한 자로서 살레르노 대학 마스터가 출제한 시험에 합격한 자들에 대하여 왕이 자격을 인정했고, 의사들에게는 왕이나 귀족의 건강을 챙기고 병을 치료하도록 하는 공적 의무를 부여했다.

의사들은 대가를 받고 의료행위를 할 수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는 영리 추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금을 납부할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례금 형식을 통해 거액을 챙길 수 있었다. 왕은 약물 취급권을 의사로부터 분리해 약제상에게 독점권을 특허하면서 세금을 챙겼고, 의사들은 약제상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직무를 감찰하는 의무를 졌다.

약을 빼앗겼지만, 의사들의 의료 독점권은 의사 아닌 자들의 무면허 의료행위를 처벌하는 권한을 통하여 유지됐다. 무면허 의료행위에 대한 처벌은 종교 재판으로 진행됐다.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1322년 11월, 2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의사가 아니면서 환자를 치료하였다는 이유로 교회 법정에 기소되었다. 그중에 ‘야코바 펠리치(Jacoba (or Jacqueline) Felicie)’라는 여성은 환자를 방문하여 소변을 받아서 색깔 등을 관찰하고,  피부를 만지고 복부를 눌러 보는 등의 진단을 한 다음에 약을 처방하거나 투약하였는데, 그녀는 정식으로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고 부모님으로부터 의술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실적으로 환자들은 의사들이 자신들을 치료해 주지 않은 경우(여성이라거나 중증이라는 이유), 여자 환자라서 가슴, 하복부 같은 부위가 노출되는 것을 꺼릴 경우 펠리치를 불렀고 그녀는 병이 치료된 경우에만 환자로부터 대가를 받았다.

파리 대학의 의학 교수진은 그녀가 의사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했다. 대주교가 관여하여 허가받지 않고 의료행위를 하는 것을 살인의 죄악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한번 더 무면허 의료행위를 하면 파문할 것이라는 경고했다. 이와 함께 60 파리 파운드 벌금에 처했다.(프랑스에서 여성이 대학에 진학하여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야 가능했다는 것도 함께 기억할 점이다.)

영국 의사는 왕당파, 약제상은 의회파...의회파의 승리

당시 영국은 대륙의 변화를 늦게 수입하는 국가였다. 옥스포드, 캠브리지 대학과 대륙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의사들이 모여서 조직을 만들고, 1518년 왕립의사회(College of physicians)가 헨리 8세로부터 헌장(a royal charter)를 받았다. 이어 1523년 의회법으로 인정되면서 면허 제도가 확립되고 무면허 의료행위를 단속하는 등 유럽 대륙과 동일한 정도의 의사 권한을 인정받았다.

 ‘왕립 헌장’이라고 하는 royal charter는 영국 왕이 특허장을 교부해 개인이나 단체에 권리 또는 권한을 부여하는 공식 문서인데, 도시, 대학, 학회와 같은 중요한 조직을 설립하기 위해 사용됐다. 왕립 헌장에는 그것의 목적과 특권이 정의되어 있다.(기록상 최초의 왕립 헌장은 123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부여되었다.)

인구 8만명이던 런던에 1966년 9월 2일 화재가 발생, 7만명이 노숙자 신세가 됐다. 5일간 87채의 교회, 1만 3천채의 집이 불탔다. 이를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라 한다.
인구 8만명이던 런던에 1966년 9월 2일 화재가 발생, 7만명이 노숙자 신세가 됐다. 5일간 87채의 교회, 1만 3천채의 집이 불탔다. 이를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라 한다.

영국은 17세기에 큰 사회적 변혁을 겪었다. 1642년 올리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의회파와 찰스 1세(Charles I)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 간의 내전(civil war)이 일어나 찰스 1세가 1649년 처형된다. 그 과정에서 약제상을 포함한 대다수 시민들은 공화당을 지지한 반면, 의사들은 왕당파를 지지했다.

1665년에는 런던에 만연한 흑사병으로 약 7만명이 사망했고, 1666년에는 1만3천채의 가옥이 불에 타는 런던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의사들은 왕당파를 따라서 런던시를 탈출해 지방의 영지로 향한 반면, 약제상들은 대화재로 폐허가 된 런던의 브랙 프라이어(Black Friar) 거리에서 건물들을 다시 짓고 시민들을 치료하는 일에 나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런던 시민들은 의사들을 왕당파로 보면서 불신했으며, 약제상들이 진료하고 약을 조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관행이 법적으로 정리된 것이 1704년 로즈 사건(known as the Rose Case)으로 알려진 소송이었다.

이 소송사건에서 도축업자 존 실(John Seale)은 약제상 로즈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치료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의사단체를 찾아가서 로즈의 치료에 대해 하소연했다. 이어 왕립의사회(royal college of physicians)가 로즈를 상대로 무면허 의료행위에 대한 형사 기소를 했다.

헨리 8세로부터 왕립 헌장을 통해 부여된 의사들의 의료 독점권을 침해했다는 내용이었는데, 2심에서 패소한 로즈는 최고심(the House of Lords)에서 승리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약제상들이 의사 면허 없이 사실상 일반의사(general practitioner)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815년에는 약제상법이 제정되어 약제상은 진찰과 처방 및 조제를 하고 이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 합법화되었다.

이것이 약사가 의사가 된 사연이며, 영국에서 내과 의사를 의미하는 ‘physician’과 일차 의료를 담당하는 ‘general practitioner’가 구분되어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역적 이유이다. 이에 더하여 약물 조제만을 전업으로 하는 약사 직종(druggist)이 후일 새로운 조직을 따로 만들어 작동하기도 한다.

의료행위 '면허', 독점 경계 넘을 수 있는 정책 변화 필요

현대에도 이러한 직종 간의 독점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의과 대학을 졸업해서 의사 면허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된다. 소위 ‘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의료법은 무면허 의료행위를 처벌하는데, 첫째는 면허가 없는 자가 의료행위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특정 면허를 가진 자가 자신의 면허 범위 밖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의사가 의학을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것 또는 간호사가 진료 보조 행위를 넘어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무면허 의료행위를 영리 목적으로 한 경우라면, 보건 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 조치법에 의하여 2년 이상의 징역형이라는 가중 처벌을 받는다. 면허에 대한 행정법적 의미는 “법령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행위(부작위의무)를 행정청이 특정한 경우에 해제하고 적법하게 이를 행할 수 있게 하는 행정행위(처분)”라고 한다.

기존에 법체계는 ‘면허’를 권한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도록 하는 증표로 보았다. 그래서 면허에 대한 법적 보호 문제는 ‘밥그릇 싸움’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앞서 살펴본 역사적 사실도 이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면허의 독점 문제를 경제적 독점으로 단순 치환하는 것도 면허 제도가 가지는 순기능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결론적으로 면허의 독점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정부는 면허의 진입 가능성과 권한의 확장 가능성을 제공하여야 한다. 또한 이 정책 목표는 교육을 통하여 달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부가 시행하는 교육 개혁의 한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장한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서울아산병원 교수(박사)는 서울대 의대와 법대,  양 대학원을 졸업했다. 세부 전공은 법의학과 사회의학이다. 대한법의학회 부회장, 대한의료법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 의학과 관련한 역사, 예술, 윤리, 법, 제도, 정책 주변 이야기를 두루 다룰 생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