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한 칼럼] 안락사와 연명의료: 이성과 야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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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한 칼럼] 안락사와 연명의료: 이성과 야만에 대하여
  • 김장한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
  • 승인 2019.07.3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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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한 서울아산병원 교수
김장한 서울아산병원 교수

[김장한 서울아산병원 교수] 이성이 특정한 행위를 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이 실천 이성의 명령에 의한 의무라고 판단된다면, 행위자가 그 행위를 하는 것은 언제나 정당한가?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하면서 자연 선택설과 적자 생존에 의한 생물학적 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러자 다윈의 사촌 프란시스 갈톤은 다윈의 이론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우생학(eugenics)'을 주장하게 된다.

자연선택설이 적용되는 자연과 다르게 사회는 열위적 특성을 가진 인간을 보호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열위적 특성이 사회에서는 제거되지 않고 생식을 통해 후대에 전달되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유전적 특성은 평균 또는 나쁜 쪽으로 향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우생학과 사회진화론, 그리고 '미끄러운 비탈길'

그는 사회 개량 또는 좋은 특성의 보존을 위해서는 인위적 생식을 해야 하며, 이것은 동물 개량 품종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했다. 또한 같은 시기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를 유기체와 동일시해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다윈의 적자 생존을 사회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 이론은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전파돼 각국의 정책에 반영되게 된다.

1945년 독일 전범을 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태인 대학살은 A급 전범 사건이었다. 나치는 아리안족에 대한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정신지체와 같은 장애인들에 대해 강제 불임을 시행, 신체 장애가 있는 노약자 정신 장애가 있는 환자들에게 안락사(euthanasia)를 시행했다.

1931년 나치당원이 된 조세프 그라프가 저술한 독일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에 있는 삽화. 나치는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려면 국민들이 60세에 이를 때까지 5만 제국 마르크를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강제 불임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931년 나치당원이 된 조세프 그라프가 저술한 독일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에 있는 삽화. 나치는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려면 국민들이 60세에 이를 때까지 5만 제국 마르크를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강제 불임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확대 재생산되어 비(非)아리안족을 청소해 독일을 정화한다는 소위 '최후의 해법(final solution)'이라 불린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유태인 600만명, 폴란드인 60만명, 수천명의 집시와 동성연애자를 죽였다.

강제 불임으로 시작됐던 과학적 이성의 실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살의 인종 청소를 시행하게 된다. 그 근간에는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의 이론이 있었다. 

재판에 참관했던 뉴욕의 정신과 의사 레오 알렉산더는 1949년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에 기고한 논문에서 초기 장애인에 대한 안락사와 후기 대학살은 '삶의 질을 평가해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독일 의사들이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동일한 출발점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윤리학에서는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 (Slippery slope argument)'이라고 한다.

나치는 '살만한 가치 없는 삶(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개념을 사용, 다섯 단계로 범위를 확장했다. 첫째는 강제 불임이었고, 뒤 이어 병원에서 심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들에 대한 치료 거부 및 살인이었다.

이후 대부분 정신 병원에서 선발된 정신 장애를 가진 성인에 대한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살인이 있었다. 동일한 공간은 수용소내의 장애 수용자로 채워졌고 최종적으로는 유태인으로 바뀌었다.

독일 나치는 몇 건의 안락사 시행 이후 대규모 살상을 시행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1937년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아기를 죽인 아버지에 대한 가벼운 처벌이 있었고, 1939년 눈이 보이지 않고 팔 다리가 결손돼 태어난 신생아를 나치의 승인하에 의사가 안락사 한 사건도 있었다. 이후 나치는 6000건에 이르는 장애 아동에 대한 살인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레오 알렉산더는 나치의 인종 청소는 '동일한 것은 동일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이성의 명령에 의한 전형적인 '미끄러운 비탈길 사례'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종 청소에 이르러서는 수 천년 동안 유럽에서 만연했던 '반유태주의'와 독일 의료계 내부에서 만연하고 있던 '인종 차별주의'에 기초해 진행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끄러운 비탈길과 같이 초기에 미묘하게 변화하는 인지하기도 어려운 태도 변화가 있던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진행 과정이 서로 연결된 것 같이 보이지만, 인종 청소는 대중에 공공연하게 만연했던 인종 차별주의가 정치적 이유로 현실화 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1961년 할리우드에서 나온 '뉘른베르크 재판' 라는 영화를 보면, 피고측 변호사역을 맡은 막시밀리안 셸은 대학살에 대한 증인 심문을 하면서, 1927년 미국연방대법원은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가 극도로 가난하며 성적으로 문란하고 정신박약의 특징이 있는 캐리 벅에 대해 우생학적 이유로 난관절제술을 시행하도록 한 버지니아주 법을 합헌으로 한 미국의 강제 불임 시술을 재판부에 밝힌다.

변론의 의도는 승전국에서도 동일한 이론에 근거한 불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말기 환자 치료중단, 미끄러운 비탈길 사례일까

현대 의학에 있어서 말기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이 독일의 인종 청소 사건들과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미끄러운 비탈길에 있는 것인지는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 안락사는 환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한 다음에 시행하는 것이므로, 인종 청소와는 다르다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현실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1971년 네덜란드 의사 포스트마는 뇌출혈로 신체 마비, 청력 소실 및 언어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안락사했다. 환자가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사정이다.

이 사건에서 포스트마는 살인죄 유죄 판결과 집행 유예라는 관대한 처분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73년 의사협회와 검사들은 함께 만든 지침을 통해 (1)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환자 (2)환자의 자율적으로 반복적이고 명확하게 의사표시를 문서로 할 것 (3)다른 의사에게 해당 사안에 대한 의견을 구할 것 (4)환자는 호전 가능성이 없는 견딜 수 없는 통증(pain)이나 고통(suffering)을 겪을 것 등 이 네 가지 기준을 모두 지킨 사안의 경우에는 국가가 의사를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이 지침이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 심각한 정신지체가 있는 정신 질환자, 말기 환자들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후 렘멜링크 위원회는 20년간 시행된 네덜란드에서 시행된 안락사를 분석했다. 1990년의 예를 들면, 13만명의 사망 건 중에서 2%에 해당하는 2300명의 안락사 건 중에서 1000명이 의사 능력이 없는 환자들에게 시행된 것으로서, 지침을 어긴 것으로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 대한 분석은 찬반 두 진영에서 다르게 나타났다. 비판론자들은 1000명의 의사결정무능력자에 대해 안락사를 시행한 것은, 바로 윤리적 경계를 지킬 수 없는 미끄러운 비탈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했다.

지지자들은 다른 두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첫째, 해당 환자들은 100% 말기 환자였다는 점이다. 환자들 대부분 한 달에서 일주일 정도 여명을 가진 상태였다. 둘째, 의사들은 의사결정무능력자의 안락사 요청을 3분의 2 이상 거절했다.

의사들에게 안락사 시행 이후 보고 의무를 부과한 새 법 시행 이후에 조사한 1995년 결과도 동일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1천여명의 환자들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미처 죽음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의식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가 됐으며, 아마도 본인이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는 사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죽여달라는 의사표시를 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건들이 보고된 것이었다. 물론 심각한 거식증 환자, 심각한 우울증 환자들에 안락사를 시행한 몇몇 사례들은 경계를 침범한 듯 보이기도 했다.

네덜란드 의료체계의 특수성과 연명의료 논의 단초

한편으로 네덜란드의 경험이 미국과 같은 시장경제 중심의 의료체계를 가진 나라에 확장되지 못하는데는 의료 체계의 문제가 있다. 네덜란드는 국가 단일보험체계로서 장기간의 가정 간호를 비롯한 의료비 부담에서 자유롭고, 주치의 제도를 통해 환자와 의사간에 신뢰가 두텁게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2001년 입법을 통한 제도 도입에 찬성했던 것이다.

인종 청소가 이성의 명령으로 정당화돼 나치즘 대학살의 근거가 됐다. 역사는 물화된 이성이 야만이 될 수 있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 준 것이다. 간략하게 기술했지만 필자는 현재 의료계에서 연명의료와 관련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논의들이 이런 철학적 문제를 극복하는 좋은 단초가 될 것으로 본다.

● 김장한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서울아산병원 교수(박사)는 서울대 의대와 법대,  양 대학원을 졸업했다. 세부 전공은 법의학과 사회의학이다. 대한법의학회 부회장, 대한의료법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 의학과 관련한 역사, 예술, 윤리, 법, 제도, 정책 주변 이야기를 두루 다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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