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한 칼럼] 의사 전문직의 성립과 의약 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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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한 칼럼] 의사 전문직의 성립과 의약 분업
  • 김장한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
  • 승인 2019.08.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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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의약분업은 언제 시작됐을까
13세기전까지는 유럽, 이슬람 모두 의사, 약사 행위 혼재한 모습
이후 의사는 의료권과 약사 감독권만...중세 군주의 과세권과 연관있는듯
김장한 서울아산병원 교수
김장한 서울아산병원 교수

[김장한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교수] 지난 2000년 우리나라 의약 분업 시행 과정에서 의료계의 반대가 매우 심각했다. 추진하는 측은 여러가지 정책적 목적을 주장했지만, 필자가 궁금했던 것은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의약분업의 슬로건이었다.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게으름 탓에 놔두었던 주제가 다시 머리 속에 나타난 것은 수년 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 의사학 교수님을 만났을 때였다.

영국의 의약 분업 역사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그 교수는 의약 분업의 이유나 역사를 모른다고 했다. 자기들도 자연스럽게 시행된 것이기 때문에, 왜 시행하고 있는지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는 답이었다.

유럽에서 언제부터 의약 분업을 시행했을까? 문헌을 찾아본 결과, 13세기 중세 유럽에서 의약 분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확정적으로 밝히고 있는 문헌은 찾기 어려웠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군주는 과세를 위해 '의사의 약물 취급권'을 제한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약물 요법의 기원와 발달

식물, 동물, 미네랄과 같은 광물을 이용한 약물 요법은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시행됐다. 고대 이집트, 수메리아, 바빌론, 중국, 인도, 그리스와 로마에서 약물 치료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있다.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 시민은 인간사 모든 문제를 관장하는 신과 교감할 수 있는 장소로서 '사원'을 이용했다. 아스클레피우스 시대는 '영적 치료'를 주로 하였고, 이후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는 치료를 위해 식물의 뿌리를 이용하는 전문가 집단들이 나타났다. 리조토마이(rhizotomoi: 식물의 뿌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Rizoma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불렸다.

5세기 이후, 중세의 지식은 수도원을 통해 보존됐었는데, 의학 지식 역시 수도사들을 통해 보존되고 시행됐다. 중세 초기부터 여행자, 순례자들이 수도원을 방문해 환대와 구호를 받았으며, 자연스럽게 환자와 빈민 심지어는 귀족들도 수도원 병원에서 치료와 구호를 받았다.

수도사는 종교에 기초한 영적인 측면에서 영혼의 구제를 중시했다. 약초를 이용하는 자연주의 방식은 영적 치료에 부가된 것으로 간주했다. 당시 수도사 생활 중에서 약초를 재배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 사원에서 순수하게 영적 치료가 제공되었다면, 수도원 병원에서는 영적 치료에 종속된 자연주의 치료가 제공됐고, 후기 중세의 성당 병원 단계에 와서는 영적 치료와 비슷한 정도로 자연주의 치료가 제공됐다.

우리나라에서 의약분업이 2000년에 간신히 시작했다. 의사와 약사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도입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도입이후에도 논란이 많았다. 사진= 연합뉴스
우리나라에서 의약분업이 2000년에 간신히 시작했다. 의사와 약사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도입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도입이후에도 논란이 많았다. 사진= 연합뉴스

중세 이슬람 의학

7~8세기에 셈족의 하나였던 아랍족이 나타나서 그리스, 로마 문명의 후계자가 됐다.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해 군사적 세력을 추구했던 시리아 지역의 우마야드 왕조로부터 이라크 지역의 아비시드 왕조(750-1258)로 넘어오면서, 문화적으로 이슬람 황금기가 시작된다.

인도와 페르시아로부터 새로운 약물들이 교역됐다. 약을 파는 상점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인근 주변으로 확산됐다. 개인 약방은 754년 또는 750년에 바그다드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인도에서 수입된 백단(sandalwood)이 약물 조제에서 사용되면서 '약을 파는 사람(saydanani)'의 명칭이 된 것은 9세기부터다. 이슬람 시대의 시장에는 시장의 질서를 관리하는 관리인 ‘히스바’가 있었다. 히스바는 시장내 모든 활동과 거래가 샤리아의 규칙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했고, 시장내 모든 활동과 거래가 이슬람의 도덕적 가치와 윤리적 기준들에 의하도록 했다. 또 옴부즈만으로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역할도 했다.

약물 제조자에 대한 규정이 별도로 존재하는데, 시럽 제조 과정에서 좋지 않은 품질의 원료를 쓰거나 잘못된 원료를 사용하는 경우에 약효가 변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관심 사항이었기 때문에, 히스바는 영업이 끝난 밤에라도 제조 시설을 사전 경고없이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의료행위는 사회에 대한 의무중의 하나였지만, 무슬림들은 이런 직업을 가지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대부분 도시에서 의사 직역은 유대인, 기독교인 또는 조로아스터인이 행하고 있었다. 이유는 의사가 그다지 수지가 맞지 않는 직업이었던 것 같다.

각 도시에는 의사들을 감독하는 최고 권위의 의사가 있었고, 환자가 사망하게 되면 의사의 과실 여부를 판단하게 했다.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경우라면 상당히 중한 배상, 자격 박탈 또는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12세기 전반까지 의사가 직접 약방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유력 가문의 자제가 의사가 되기 전에 어린 나이에 약제상의 가게에 들어가서 수련을 받아 약제상이 된 다음에 의학을 공부하는 사례도 보고된 게 있다.

13세기 전후 중세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나타나는 시기에, 이슬람은 의사가 직접 조제하거나, 의사가 조수를 고용해 약을 조제하거나, 약방에서 의사 처방전에 기해 약물을 조제하는 형태가 모두 인정된 혼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중세시대 이슬람지역의 진료실 모습. 의사가 진료하고 그 밑에 있는 직원들이 처방에 따라 약을 제조, 환자에게 주는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세시대 이슬람지역의 진료실 모습. 의사가 진료하고 그 밑에 있는 직원들이 처방에 따라 약을 제조, 환자에게 주는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세 유럽과 르네상스 시대: 의학과 약학의 발달

유럽에서 남부 이태리와 시실리는 그리스-아랍 의학을 받아들이는 입구였다. 7세기경 남부 이태리에 설립된 수도사 학원의 하나인 살레르노 의학 학원에서는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의료 교육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11세기 초가 되면서 프랑스 몽펠리에 지역에서 살레르노 의학 학원 졸업생들이 교수로서 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초기 의학 학원들이 점차 대학으로 발달하면서, 의사는 전문직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부 유럽 지배자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of Hohenstaufen, 1194~1250)는 1231년 시실리를 다스리는 성문법을 제정해 의약분업을 최초 규정하고, 공국 내에서 왕의 자격증 없이 치료를 하거나 의학을 가르치는 행위도 금했다.

이를 위해 왕의 법원과 살레르노 대학의 마스터들이 시행하는 시험을 통과한 다음에 의사 자격이 수여됐다. 또한 의사들로 하여금 약제상에 대한 감독을 하도록 했다. 1271~1322년, 바르(Basle; 스위스 바젤(Basel)의 옛 이름)에서 발표된 ‘바르 약제상 서약에 의하면 “어떤 의사도 환자를 치료하면서 바르 지역내에서 약제상을 보유하거나, 약제상이 될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의사가 약물을 조제하는 것은 금지됐고, 대신에 의사 자격이 없는 자들이 의료 행위하는 것을 감시하는 권한이 의사들에게 부여됐다. 이 제도는 이태리, 독일, 프랑스 및 영국으로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된다.

중세 유럽에서 의약 분업을 도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세 유럽에서 의약 분업을 도입한 이유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동방으로부터 수입 판매되는 향료와 약물에 대한 군주의 과세권과 연관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해 보겠다. 첫째는 중세는 종교적 지배권으로서 교황권과 세속 권력으로서 황제권이 교차하는 지배하는 시대였다. 중세 초기에 수도원 또는 성당에서 의료를 배웠던 수도사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게 된 자들은 의사들도 신학, 법학자들과 동일한 중세의 신분을 차지하게 됐다. 이들 신분이 가지는 권리와 의무는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 가지는 위치와 연결돼 있다.

예컨대 교황 그레고리 9세(Gregory IX)는 1231년 파리 대학의 자율성을 인정한 교서를 발표한 바 있다. 대학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스페인과 남부 이태리 지역의 대학을 제외한 다른 유럽 지역의 대학은 자치권이 인정됐다. 이런 신분 보호의 결과, 자율권을 얻은 대학내에 일정한 신분을 획득한 의사 집단에게는 세속 군주의 과세권이 미치지 못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신분상의 문제도 있었다. 중세는 신분 사회였고, 신분은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초기 중세 신분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투하는 자(bellatores), 기도하는 자(oratores), 손으로 일하는 자(laboratores)이다.

대학을 통해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의료인 집단과 약제상을 포함해 전문 교육을 받지 못한 집단은 신분적으로 구별됐다. 특히 약물 조제의 문제는 치료의 일환이기 때문에 의사로서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의사가 약제사의 역할을 겸하게 되면 자신의 신분을 낮추는 것이라서 의사들은 ‘laboratores’ 신분에 있는 약제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예는 치료 비용에 관한 명칭에도 나타나고 있다.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고 받은 것은 일반적인 대가, 비용이 아니었다. 약제상이 거래 대상으로 약을 주고 ‘메르세스(merces)’를 받았다지만, 중세 의사들은 기도하는 자로서 아너라리움(honorarium)’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너라리움은 사례금으로서 주어진 것을 보유할 법적인 권한(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을 권한)이 있지만, 주지 않을 경우에는 이를 강제할 수 있는 법적인 청구권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의 사례금에 대한 과세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둘째는 약국개설권은 조세를 포함한 세속 군주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의미를 노르웨이의 예를 통하여 살펴보자.

16세기 베르겐은 독일 한자 동맹의 4개 교역소 중의 하나였는데, 베르겐으로 오게 된 덴마크 상인 프로윈트(Nicolaus de Freundt)가 크리스티안 4세에게 청원해 1595년 12월 노르웨이 최초의 약국을 열었다. 그리고 약물을 조제하는 권리를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영업 대가로 왕에게 세금을 납부한 기록이 있다.

약국에 대한 배타적 개설권이 있다고 하지만, 일정한 지역내에 몇 개의 약국을 개설하도록 할 것인가는 왕의 재량 사항이었다. 프로윈트가 왕으로부터 받은 편지 내용을 보면 “약국 개설권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약국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이러한 약국의 배타적 개설권은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셋째는 동시대에 지중해를 마주 보고 있던 이슬람 지역내의 의사들이 진료와 조제를 자유롭게 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슬람 시대에 의사는 시장에서 세금을 내면서 진료를 하는 계급이었기 때문에 의료행위와 조제행위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시대가 지나면서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 의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약제상 수련을 받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슬로건은 주장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우리도 받아들여야 선진국이 된다는 식의 접근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의약을 같이 취급하는 전통을 가졌던 일본, 대만 등 동양권의 나라들에서 의약 분업 제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는 근거가 좀 더 탐구되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 편에서 이 문제를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 김장한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서울아산병원 교수(박사)는 서울대 의대와 법대,  양 대학원을 졸업했다. 세부 전공은 법의학과 사회의학이다. 대한법의학회 부회장, 대한의료법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 의학과 관련한 역사, 예술, 윤리, 법, 제도, 정책 주변 이야기를 두루 다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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