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학전살리기', 대학로 소극장에 '한줄기 빛'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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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학전살리기', 대학로 소극장에 '한줄기 빛' 될까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4.01.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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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19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초연을 관람하고 한동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계속된 무대앓이 끝에 한 극단의 오디션을 봤고, 배우가 됐다. 동경하던 공간이 일터가 되면서 배고프고 힘든 삶이 이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행복했다. 예술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학전소극장 관련 소식이 이어지는 동안 잊고 지냈던 청춘의 히스토리가 불쑥 떠올랐다. 기억 어딘가에 박제 돼 있던 과거가 소환되면서 자연스레 지난 연말, ‘지하철 1호선’을 다시 보고싶어 그곳에 갔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 ‘Linie 1’을 학전의 김민기 대표가 번안하고 한국 사회에 맞게 각색해 만든 이 무대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은 하류인생들이다. 작품은 연변 출신 ‘선녀’가 결혼을 약속한 ‘제비’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헤매며 불운하고 우울한 일들을 겪지만 결국 그녀는 절망대신 희망을 발견한다는 스토리다.

관객들로 190여 객석은 가득 찼고, 연신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달라졌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같았고, 작품 속 90년대의 고단한 삶도 현실의 삶과 다른 듯 닮아있었다. 무대와 객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감격스러웠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짠한 느낌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 작은 극장에서 29년간(공연을 멈춘 10년 포함) 4257회 공연, 누적 관객 73만명의 대기록을 세우며 뚝심있게 달려준 ‘지하철 1호선’이 대견했다. 

많은 이들의 연대가 쏟아올린 ‘학전 살리기’

앞서 1991년 3월 15일 문을 연 학전은 올해 같은 날 33년만의 ‘소멸’을 예고했다. ‘학전다운’ 퇴장 결정에 많은 문화예술인들과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폐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다. 앞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학전소극장을 재정비해 어린이 극장이나 대중가수들 공연장으로 활용할 전망이다.

1991년 김민기 대표의 음반 계약금으로 시작된 극장은 그의 저작권료까지 쏟아내 운영을 지속해왔다. 김 대표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경영난과 건강문제까지 겹치며 대학로의 상징은 문을 닫아야만 하는 한계상황에 내몰렸다. 

“오로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왔을 뿐입니다” 

그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극장을 놓지 않았던 이유다. ‘학전다운 버팀’은 그렇게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돈벌이가 안 되는 ‘학전 어린이 무대’ 시리즈를 제작해왔고,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댄스음악이 유행하며 설 곳이 없어진 통기타 가수들에게 기꺼이 무대를 내주었다. 또 배우를 꿈꿨던 이들에게 그 꿈을 펼치게 해줬다. 김 대표의 사명감으로 학전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희망의 공간이 됐다.

소극장 ‘학전’은 한자로 배울 학(學) 밭 전(田)자를 쓴다. “씨앗과 완성품 사이에는 모를 키우는 못자리라는 과정이 있는데, 이 과정을 중시했다”는 김 대표의 철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인재들이 그곳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초연 장면

폐관 결정에 못자리를 통해 스타가 된 가수 박학기, 박승화, 윤도현, 작곡가 김형석, 배우 설경구, 장현성, 감독 방은진 등이 참여하는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가 꾸려졌고, 대학로 공연계에 무관심했던 언론들은 학전과 김민기 대표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여기에 학전을 사랑하는 관객들의 발길이 공연장에 이어지면서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나서 마침내 ‘학전 살리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사라짐’을 예고한 절망 속에서 많은 이들이 연대해 극적으로 희망이 생겨났다.

인생은 돌고 돈다고 했던가. 마치 긴 세월 희망의 씨앗을 뿌린 김민기 대표에게 그것이 다시 선물처럼 돌아간 것 같다. 소멸 직전 기사회생이라 다행스럽고, 소멸 직전 불붙은 관심이라 미안하다.

‘문화지구’ 대학로의 현주소

지난해 공연티켓 거래액이 1조 원을 넘겼다.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지만 명암은 분명하다. 스타가 출연하는 대형 연극과 뮤지컬은 호황이었지만 대학로 소극장의 조명은 하나 둘 꺼지고 있다. 한때 대학로에 200 여개였던 극장은 현재 120여개 정도 남았다고 한다. 공연계도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가 뚜렷해졌다. 높은 임대료와 대중의 무관심은 대학로를 오랜 시간 지탱해온 ‘헝그리정신’으로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다. 

’학전 살리기’가 ‘대학로 소극장 살리기’로 확산될 수 있을까. 한 달 임대료만 500만원에서 천만원, 예술인들에게는 이 비현실적인 숫자가 버겁기만 하다. 소극장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지정된 문화지구 대학로에서 사라지는 소극장... 아이러니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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