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지증왕①…개혁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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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지증왕①…개혁군주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1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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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세력 지원 얻어 소지왕계와 싸워 집권한 혁명 정권

서기 500년, 지증왕이 소지왕을 이었다. 지증왕은 소지왕과 마찬가지로 내물왕에서 내려왔지만, 내려오는 계통이 다르다. 소지왕은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의 장자 계열이다. 학계에서 논란이 있지만, 지증왕은 눌지왕의 동생인 복호(卜好) 계열로 파악되고 있다.

삼국사기엔 소지왕이 아들이 없어 지증왕이 대신 왕위를 이었고, 즉위 시 나이는 64세 고령이었다고 적고 있다. 뭔가 설득력이 약하다. 고대 사서에 ‘아들이 없어서’, ‘천성이 착해서’, ‘국인(國人)들의 평이 좋아서’ 등의 표현과 함께 권력이 승계될 경우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정통성이 없는 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술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울릉도의 비경. 지증왕은 울릉도를 영토화한 임금이다. /사진=이효웅

실제로 소지왕은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의 모순인 셈이다.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소지왕에서 지증왕으로 넘어가는 과정 중 상당한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고, 일종의 쿠데타를 통해 지증왕이 즉위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소지왕 마지막 해의 기록에 미심쩍은 문구가 발견된다.

 

“소지왕 22년(서기 500)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금성의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가득 끼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와 같이 고대 사서에서 ‘우물에서 용이 났다’든지, ‘폭풍우가 불고 누런 안개기 끼었다’는 기상이변에 대한 내용은 당시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반란의 조짐은 그 다음 문장에서 확인된다.

 

소지왕 22년(서기 500) 가을 9월, 임금이 날이군(捺已郡)에 행차했다. 그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벽화(碧花)라고 하는 딸이 있었는데, 나이는 열여섯으로 실로 온 나라 안에서 뛰어난 미인이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수놓은 비단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서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음식을 보낸 것으로 생각했으나, 열어 보니 어린 소녀였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궁에 돌아와서 그리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두세 차례 평복을 입고 그 집에 가서 소녀와 잠자리에 들었다. 도중에 고타군(古陁郡)을 지나다가 어떤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요즘 백성들은 임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으로 여기지만 나는 의심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임금이 날이(捺已)의 여자와 관계하러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자주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무릇 용이라도 물고기의 껍질을 쓰고 있다가는 고기잡이에게 잡히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의 임금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럽게 여겨 곧 몰래 그 여자를 맞아들여 별실에 두었다. 아들 하나를 낳기에 이르렀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날이군은 경북 영주로, 김씨 왕조의 시조 성한왕(星漢王)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학자 강종훈은 ‘문무대왕비’에 기록된 성한왕의 출생지가 죽령 바로 남쪽인 지금의 영주 지역이며, 소지왕이 이곳에 김씨 조상을 모신 신궁을 만들었다고 했다. 소지왕은 재위 9년에 시조(성한왕)가 태어난 내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했다. 강종훈은 내을을 경주로 보지 않고, 영주 인근일 것으로 보았다.

소지왕은 날이군에서 벽화부인을 만나 아들을 낳았다(소지 22년조에 9월에 벽화부인을 만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에는 무리가 있다. 아직 임신 중이거나, 낳아도 아주 어렸을 것이다). 왕조 시대에 임금이 후궁을 얻어 아들을 낳는 것은 봉건왕조 시대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정통 사서에 이런 일로 임금을 비난하는 글귀를 적기 힘들다. 진흥조에 이사부와 거칠부(居柒夫)가 신라의 역사(國史)를 기록하면서 지증왕 계승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지왕의 잘못을 남겼던 게 아닌가 싶다. 경주부터 영주까지 순행할 정도로 강건하던 소지왕이 여염집 미인과 사랑을 나누다 여론의 뭇매를 맞자 두 달 만에 급사하는 장면은 정사(正史)의 기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어느 노파가 “무릇 용(임금)이라도 물고기의 껍질을 쓰고 있다가는 고기잡이(반락 세력)에게 잡히게 되는 것이지요”라는 말 속에서 소지왕과 지증왕의 교체기에 있었던 반전 드라마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지왕은 신궁을 짓고, 시조묘에 세 차례나 행차하며 김씨 세력의 중심임을 강조했다. 그가 김씨 왕족의 본거지인 영주(날이군)를 비롯해 안동(고타군), 구미(일선군)을 오갔다는 기록은 지방의 지원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며, 그곳에서 낳은 아들이 서라벌로 들어와 임금이 될 경우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세력이 경주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지증왕의 부인은 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이찬 등흔登欣의 딸이다.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박씨 세력이 김씨 방계인 지증왕과 연대해 김씨 정통을 주장하는 소지왕의 아들 대신에 지증왕을 세웠다는 그림을 그려도 무난할 것 같다. 경북 내륙의 토착 세력과 손을 잡은 소지왕계와 해상 세력(고기잡이)의 지원을 얻은 지증왕계가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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