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지증왕②…덕업일신 망라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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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지증왕②…덕업일신 망라사방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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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를 신라로, 임금 호칭을 왕으로 개칭…생산력 증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정권은 정통성이 취약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강력한 개혁, 개방조치를 취해야 한다. 선진국 문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사회를 개혁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며, 농업 혁명을 주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증왕은 즉위 초기 과감히 개혁 조치를 취했는데, 이것 역시 쿠데타 정권으로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배 권력 내부의 갈등을 딛고 권력을 잡았기에 지배층 내부보다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마련했다. 민중과 손잡고, 지배 집단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지증왕조에 행해진 것이다.

지증왕은 집권 초기에 체제 정비에 나섰다. 개혁 군왕은 즉위 3년에 백성들의 말 못할 고통중 하나인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소를 몰아서 밭갈이(牛耕)하는 법을 개발해 농사를 권장했다. 아울러 지증왕 6년에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이사부를 동해 해상 세력의 중심지인 삼척의 통치자로 보내고, 그해에 선박 이용 제도를 정비해 해양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한다. 지증왕 4년(503년)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임금의 호칭을 왕(王)으로 정했다.

 

“신하들은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했습니다.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德業日新)’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덮는다(網羅四方)’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또 예부터 나라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으로 칭했고, 존엄한 호칭을 정하지 못했으니, 지금 여러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임금이 이 말에 따랐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은 ‘신라’라고 정한 국호 속에 나라의 비전을 담았다. ‘신(新)’에서 내치(內治)를 의미하는 ‘덕업일신(德業日新)’의 뜻을 담았고, ‘라(羅)’에서 외치(外治)에 해당하는 ‘망라사방(網羅四方)’의 의미를 녹였다.

지증왕의 덕업일신 정책은 순장제 폐지, 우경牛耕 실시, 주군현(州郡縣)제 실시 등으로 나타난다. 순장제 폐지는 백성과 손잡고 귀족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순장은 임금이 죽으면 남녀 각 다섯 명씩 함께 묻는 제도였는데, 이는 흉노족의 풍습이었다. 또 다른 흉노 계열로 파악되는 가야국에서는 마지막 왕까지 순장을 치렀는데, 신라는 가야보다 훨씬 앞서 살아있는 목숨을 매장하는 비인간적인 제도를 폐기한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후(B.C. 210년)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의 모형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제작한 병마용을 매장토록 지시했다. 중국에서도 국왕이 죽으면 섬기던 가신이나 병사도 따라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시황제는 국력 쇠퇴를 우려해 병사들과 꼭 닮은 인형(병마용)을 만들어 매장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 경주 월성의 석빙고 /사진=김인영

 

우경 실시

우경은 소를 몰아서 밭을 가는 농법으로 지증왕 때 처음 사용됐다. 이전까지는 쟁기질을 두 사람이 했다. 사람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쟁기를 잡고 따라가는 방식이다. 우경 제도를 실시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는 것뿐 아니라, 소의 힘을 이용할 수 있어 농사일이 훨씬 수월해졌을 것이다.

우경의 실시는 무기로 사용되던 철이 농사 도구인 괭이, 호미의 단계에서 쟁기 단계로 넘어가고, 철의 강도도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쟁기의 모양도 사람이 끌던 때와 달라진다. 소가 끄는 쟁기는 사람이 끌 때보다 넓고 두터워졌다.

소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농지를 개척할 때보다 험한 땅도 농지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농경시대의 우경 실시는 근대의 산업혁명과 같은 역할을 했다. 실제로 소로 쟁기를 끌면 인력으로 농사를 지을 때보다 소출所出이 2~3배로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원시 농경시대에 우경은 일종의 농업혁명인 셈이다.

반면 우경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경지 면적을 혁명적으로 넓힐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토지와 소, 쟁기 등 생산수단을 가진 유산 계급(지주층)과 땅과 생산 도구가 없는 무산대중의 계급 분화가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앞서 우경을 실시함에 따라 삼국 가운데 가장 높은 농업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높으면 인구가 늘고, 병력 자원이 많아진다. 경제사적으로 볼 때 신라 팽창의 원동력은 이러한 농업 신기술의 개발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먹고 남은 잉여 농산물이 늘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의 농산물 교환 시장이 발생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신라는 소지왕 12년(서기 490년)에 처음으로 서라벌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유통시켰다. 이어 지증왕 10년(서기 509년) 서울 동쪽에 시장을 설치했다. 우경을 실시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급증함에 따라 서라벌에 한 개였던 시장이 두 개로 늘어났다는 얘기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당시 신라에서 철을 화폐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는 우경 실시에 의한 시장의 확대로 철이 화폐 역할을 대신하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을 말한다.

지증왕은 내치의 일환으로 상복(喪服)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시행하고, 처음으로 담당관에게 명해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경주 월성에 석빙고가 있다). 아울러 가뭄이 들에 백성이 굶주리자, 국가의 창고를 풀어 구제했다. 이처럼 지증왕은 백성을 배불리 하는 데 힘을 쏟은 임금이었다.

지증왕이 덕업일신에 주력했다면, 이사부는 망라사방, 즉 외치에 힘쓰며 임금을 도왔다. 이사부는 지증왕 초기,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변경의 관리가 되어 거도(居道)의 계략으로 가야를 속여 땅을 빼앗고, 이어 실직과 하슬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복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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