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반도체호황 온다는데] ① 1995년 첫 '반도체 호황'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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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반도체호황 온다는데] ① 1995년 첫 '반도체 호황' 어땠나
  • 정세진 기자
  • 승인 2020.12.2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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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중반 3저 호황 이어 1995년 반도체 호황...경기 정점
MS의 윈도 95 출시로 PC수요 폭발...반도체수출 호조로 원高 압박 고조
"2000년까지 호황 이어질 것" 착시현상 나타나...이후 경기 급속 하강
강만수 당시 차관 "반도체 호황에 다른 업종 추락 사실 몰랐다" 탄식
SK하이닉스의 클린룸 내부 전경. 사진=SK하이닉스 뉴스룸
SK하이닉스의 클린룸 내부 전경. 사진=SK하이닉스 뉴스룸

[오피니언뉴스=정세진 기자] 코로나 팬데믹 2년차인 2021년에 한국 경제에 반도체 호황이 예고되어 있다. 비대면(언텍트)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ICT 분야에 새로운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비대면 교육 컨텐츠 사업에서부터 콘솔 게임 확대까지 '집콕' 현상이 보편화할수록 삼성전자, SK하이닉스등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호황을 맞을 전망이다. 그러나 반도체 호황은 다른 산업분야에서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지난 1995년 단군이래 최대호황이라던 첫 '반도체 호황'은 착시 경제를 불러왔고, 2년뒤 IMF외환위기까지 휘몰아치게 했다. 과거 우리나라의 반도체 호황을 되돌아보고, 내년 도래할 반도체 호황의 모습을 예상해본다. [편집자주]

메모리 반도체 사업엔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특유의 사이클이 있다. 수출에서 반도체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한국 경제는 이 사이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반도체 수출 물량이 줄거나 가격이 하락할 경우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도 침체가 찾아왔고, 반도체 수출이 호조를 보일 때는 '과잉투자'라는 착시현상도 나타났다. 

또 어느 시기에는 경제 전반이 어려움을 겪는데도 반도체 산업만은 글로벌 사이클에 따라 초호황을 누릴 땐 '반도체 착시효과'가 생기기도 한다. 착시효과의 최고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 불리던 첫 '반도체 호황'이었다.

1983년 64K D램 개발 성공을 발표하고 있는 강진구 삼성반도체(1988년 삼성전자와 합병) 사장. 사진=삼성반도체이야기
1983년 64K D램 개발 성공을 발표하고 있는 강진구 삼성반도체(1988년 삼성전자와 합병) 사장. 사진=삼성반도체이야기

1980년대 '3저 호황'이 끝나니 '반도체 호황' 시작

1986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12.9%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였다. 이때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국제 수지가 흑자로 전환된 시기다. 즉, 수출액이 수입액보다 많아졌다는 의미다. 2차 오일쇼크가 끝난 후 1985년 하반기 시작된 저금리, 저유가, 원화 약세 등 3저 효과 덕이었다.  

1980년 1월 4일부터 산출된 종합주가지수(2005년 11월 코스피지수로 바뀜)는 1985년에 163.37을 기록할 만큼 상승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3저호황과 서울올핌픽 특수 등으로 1988년말 907.20을 기록한 후 1989년 4월 1일에는 1007.77로 처음 1천포인트를 넘겼다. 시중에 여유자금이 넘쳐 주식시장으로 흘렀고 기업들은 대규모 인력 채용을 진행했다. 3저호황은 대체로 1989년 끝났지만, 반도체 호황이 뒤따라왔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 변화 추이. 자료= 김재훈(2013). 한국 반도체기업의 유형 변화. 사회과학연구, 52(1), 189-227

반도체 호황은 '단군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우리나라 경제에 안겼다. 각종 찬사가 이어졌고, 향후 경제 전망도 장미빛 일색이었다. 경상흑자로 달러는 넘쳐났고, 장밋빛 전망에 금융회사들은 외채를 끌어다 기업들에게 빌려줬다. 달러가 싸졌으니 갚을 걱정도 덜하자 기업들의 과잉설비투자가 줄을 이었다.   

반도체 산업은 1995년 167억달러를 수출, 전체 수출의 13.4%를 차지할 정도로 몇년새 주력 산업으로 성장했다. 앞서 1992년 이후 줄곧 수출 품목 1위를 지켰지만, 2년간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던 사이클을 따르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1992년 정점을 찍은 반도체산업 경기가 1994년엔 저점을 찍어야 했다. 그런데 반도체 호황은 1994년까지 이어지더니 1995년에야 정점을 찍는다.

PC의 글로벌 수요 증가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구조가 큰 변화에 들어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윈도95’를 출시한 것이 메모리반도체 수요의 본격적인 증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단군이래 최대 호황...실업률 역대 최저 

삼성전자, LG반도체, 현대전자 3사는 1990년대 들어 해마다 평균 50%가 넘는 성장을 거듭했다. 1995년에 3사 평균 성장률은 98%나 됐다. 1992년 30억5600만 달러였던 3사 매출합계는 1995년에 159억7400만 달러로 5배 늘었다. 1994년 세계 반도체기업 중에서 삼성이 7위,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각각 20위와 21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반도체 산업에 발을 들인지 10년만의 일이다.

김수연, 백유진, 박영령 (2015). 한국 반도체사업의 성장사. 경영사학 제 30집 제2호.
글로벌 반도체산업의 매출 10위권 기업 순위 변화. 자료=김수연, 백유진, 박영령(2015). 한국 반도체산업의 성장사. 경영사학 제 30집 제2호.

국내 반도체산업이 호황을 이어가면서 이들 전자 3사는 인력을 대거 채용했다. 1994년 반도체 분야에서만 3500명을 뽑은 삼성전자는 1995년엔 4500명 추가 채용 계획을 발표했다. 이같은 규모는 어느 정도에 해당될까.

지난 2018년 삼성그룹이 경제활성화를 위해 3년간 총 180조원을 투자하고 4만명의 신규 채용에 나선다고 발표했는데, 3년간 4만명 채용이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 SDS 등 삼성 전자계열사 인원을 합한 수치다. 당시 경제규모까지 감안하면 1995년 1만명 가까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채용 규모는 엄청난 숫자였다.

전자 3사가 경쟁적으로 인력확보에 나서면서 비상이 걸렸다. 1995년 5월 실업률은 1962년 관련 통계를 조사한 이래 역대 최저치인 1.9%를 기록했다. 20~30대 사이에서는 '완전고용' 상태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단군이래 최대 호황은 이렇게 다가왔다. 전자 3사의 비약적인 성장, 수출호황으로 인한 경상수지 흑자, 청년층 완전고용 등.   

그러나 호황엔 끝이 있다...달러값이 오르다 

1995년 1월엔 제조업 가동률(85.4%)이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실업률은 1983년이후 가장 낮아 사실상 완전고용 수준에 도달했다. 당시 국내 언론들중 대부분은 화려한 수식어로 호황의 장기화를 예고하기도 했다.

반도체호황이 정점으로 치닫던 1995년 8월중순 한 언론은 삼성전자 관계자의 말을 인용, "NEC, 히다치, 도시바, TI등 30여개 메모리 업체들이 추가로 매년 한개씩 공장을 짓더라도 2000년대 초까지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가는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며 장기호황 기대감을 전달했다. 연초에 다른 언론이 사설을 통해 경기 과열을 경고하면서 "경기란 정점에서 몇달 몇년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정점이라고 느끼기도 전에 하강을 시작한다"며 "사실 정점이란 사후에나 인식이 가능할뿐"이라고 경고한 것이 무색했다. 

반도체 3사는 1994년 이후 매년 조단위 투자를 하며 시설 증설에 나섰고 언론도 이런 움직임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D램 가격은 1995년말 정점을 찍고 하락하기 시작한다. 호황이 끝나가고 있었다. 

D램 가격 변화 추이. 자료=김종섭, 박태호(2005). 외환위기와 무역구조 변화

1996년과 1997년 메모리반도체 D램 가격이 각각 51%와 65% 폭락했다. 수출 효자품목이었던 반도체의 가격 하락은 제조업 전체 경쟁력에도 영향을 줬다. 고용도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1996년 50대그룹 신규 채용규모가 전년대비 15% 감소하더니 1997년엔 20% 이상 감소했다.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반도체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사업확장에 투자했던 삼성, LG, 현대 등 전자 3사는 D램 가격 급락으로 사업을 축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전후로 한국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도 약세로 돌아섰다.  

충격은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으로 그대로 전달됐다. 1996년 연초 888.85포인트로 출발한 종합주가지수는 26% 폭락한 651.22포인트로 한해를 마쳤다. 수출호황으로 원화 강세가 심했던 서울외환시장에서 1995년말 달러당 747원이었던 달러원 환율은 1996년 여름엔 810원, 11월엔 835원까지 급등했다. 수출부진으로 서울외환시장에 달러가 부족해진데다가 외환딜러들이 달러 강세에 베팅하면서 원화는 약세로 돌아섰다. 외채가 큰 걱정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호황에 경제주체들 눈이 멀어"

산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1995년 전후로 한국 제조업 수출 경쟁력이 약세로 돌아선 것은 ▲원화 고평가 ▲지속적인 엔화 약세 ▲반도체 가격 하락에 따른 교역 조건 악화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1995년 13.4%)이 높다보니 반도체 가격 하락이 전체 무역수지 악화에도 영향을 줬다. 

반도체와 같이 자본집약적 제품의 수출이 늘면 원화는 평가절상(원가가치 상승-환율 하락)된다. 이 경우 반도체 外 산업은 수출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수출 중소기업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우리나라는 일본기업과의 경쟁이 한창이었다. 1995년 4월 역플라자합의 이후 1달러 당 83.6엔이었던 일본 엔화는 1996년 말에는 113.7엔까지 상승(엔화가치 하락)했다. 일본 제품과 비교해 우위에 있던 가격 경쟁력이 급속히 줄어든 것이다.   

조연성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1980년대말과 1990년대초에는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기술력을 따라잡는 중이었는데, 엔고 덕에 우리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더해지는 시기였다"며 "그러나 1994년 이후 엔화가 대폭락하면서 우리 제품들의 가격 경쟁력이 줄어들고 무역수지 적자가 연달아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 전 산업은행 회장은 1998년 재정경재부 2차관 퇴임사에서 “1995년 반도체 호황에 눈이 멀어 경상수지가 악화되고 다른 업종의 경기가 추락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며 '반도체 거품론'을 제기했다. 그는 이 착시현상이 후일 IMF 한파를 몰고 온 주범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원화 강세 압박에 대한 대응을 소홀히 했다. 강 차관이 이후 기획재정부 장관이 됐을 때 '세자리수 환율' 정책(원화 약세 정책) 고수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1995년 제조업 생산에서 8.6%의 비중을 차지했던 반도체 산업은 IMF 시기인 1998년에는 21%로 비중이 커진 상태였다.  

삼성의 위기, LG와 현대는 합병

반도체 호황은 혹독한 시련을 안겼다. 외환위기 후 정부는 산업 분야별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정부는 중복 투자를 이유로 삼성전자에 비해 적자규모가 컸던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합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정부 압력으로 1998년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합병됐고, 2001년 사명을 하이닉스반도체로 바꿨다. LG전자는 LG반도체 주식 전량을 현대전자에 넘기고 반도체 산업에서 철수했다. 

삼성도 위기를 피해가긴 어려웠다. 비즈니스위크지는 1998년 '삼성의 위기'라는 기사를 통해 "삼성이 컴퓨터, 백화점, 미술관, 휴대폰, 병원 등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지만 많은 회사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며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인 삼성전자가 다른 계열사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45억 달러 규모 채무 보증까지 해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삼성그룹이 반도체 호황 때 얻은 수익을 자동차 등 불확실한 사업에 투자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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