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칼럼] 내 한 표의 가성비를 극대화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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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칼럼] 내 한 표의 가성비를 극대화하려면?
  •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20.04.0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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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제를 다시 생각함㉑: 공화제와 선거- 4.15 총선 심판의 기준은?
민주화後 반복되는 정치불안정과 비효율...총선의 진정한 헌법적 의미는?
선거는 원래 보통민주적 제도라기보다 제한민주제적인 한계 있어
인물보다 정당, 지역보다 계층이익 고려해야 유권자중심 선거결과에 가까워져
이번 총선에선 문재인 정부보다는 제20대 국회에 대한 평가가 중심이 되어야
김종철 연세대 교수
김종철 연세대 교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총선이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어설픈 선거제도 개혁이 정치공학적 꼼수에 의해 개악으로 전락하면서 어느 때보다 유권자의 전략적 판단이 중요하게 되었다.

6월 항쟁의 물꼬를 열었던 1985년 총선이나 촛불혁명의 전조(前兆)가 되었던 2016년 총선처럼 선거 국면의 분수령마다 집단지성의 저력을 보여 주곤 했던 유권자들이 이번에는 어떤 해법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한 독재시대의 유산인 원시적 정당제도와 억압적 선거법 등 정치관계법의 퇴행성 때문에 정치체제의 불안정성과 비효율성이 반복되면서 촛불혁명의 정신이 잦아들고 있는 지금, 선거의 헌법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선거는 민주적인가?

선거는 민주적인가? 전문가들에겐 낯설지 않지만 일반인들에겐 뜻밖인 질문일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선거의 민주성을 의심하다니!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선거는 민주정보다는 엘리트 지배에 기초한 귀족정에 친숙한 제도로 이해되었던 역사가 있다. 선거(election)와 엘리트(elite)라는 정치용어가 모두 '뽑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eligere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정은 선거 대신 '추첨제'를 선호하였다. 추첨의 대상인 공직은 집행적 성격이 강했고 입법 등 정치적 성격의 공무는 시민 전체의 참여에 의한 직접 결정방식이 선호되었다. 결국 이 시기 민주정은 직접 민주제를 본질로 했고 대표를 통한 간접 민주제, 즉 대의민주제는 생소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선거가 민주정의 핵심제도로 자리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 시기를 거쳐 근대 시민혁명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본질적 변환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직접 민주제를 전제한 것이라면 근대의 민주주의는 간접 혹은 대의 민주제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대의 민주제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독자적인 최고 가치로 보는 ‘순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권이나 사회정의 등 다른 가치와 결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전제하는 ‘혼성적’ 민주주의 혹은 ‘가치지향적’ 민주주의이다.

혼성적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대표자들’의 다수결적 결정방식으로 전환되고 고대 그리스 시절 민주제가 의미했었던 ‘전체 시민’의 다수의지에 대한 고려는 부차적 참조사항으로 전락하였다. 사실 선거는 능력이나 사회경제적 차이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 정치적 평등을 저해할 위험이 높다. 국회의원들의 성별, 연령, 자산, 직업 등이 일반시민의 평균치나 다양성과 턱없이 차이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거는 결국 ‘보통’민주주의가 아닌 ‘그들만’의 잔치인 ‘제한’민주주의로 흐를 수 있는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다. 대의제에서 유권자들이 한 표로 소중한 주권을 행사했다고 믿지만 선거제도라는 '블랙박스'를 거치고 나오면 자신의 선택이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1대 총선은 최악의 의정을 낳았던 제20대 국회에 대한 평가다. 국회를 이렇게 만든 정당에 대한 심판이어야 한다. 사진= 연합뉴스
21대 총선은 최악의 의정을 낳았던 제20대 국회에 대한 평가다. 국회를 이렇게 만든 정당에 대한 심판이어야 한다. 사진= 연합뉴스

인물이냐 정당이냐?

이번 선거제도를 아무리 포장하더라도 그 본질은 선거법 개정 전과 마찬가지로 지역대표 중심 다수제 선거제도이다. 총 300석 가운데 6분의 5를 넘는 253석을 지역선거구에 배정해서 그 선거구에서 한 표라도 더 얻게 되면 당선되기 때문이다. 모든 유권자가 다 지역구 투표, 정당투표 두 표씩 평등하게 행사하고 그 결과 지역구 당선자와 비례대표 당선자가 정해지니 민주적이라고 생각하고 만족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 표는 지역거주에 따른 투표가치의 차등이나 사표의 남발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거대 정당들이 과대 대표되는 ‘조작된 다수’(manufactured majority)를 낳는데 내 소중한 주권이 '알리바이'가 되는 셈이다.

지역구투표는 정당투표에 비해 인물 선택권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크다. 그러나 거기까지. 지역구투표에서도 고정번호가 배정되는 선거제도의 큰 영향 하에 정당공천이 당락을 가르는 최대 변수다. 사실 인물선거는 부수적 효과만이 있을 뿐인데 적잖이 많은 투표자는 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자와 민주공화정신에 투철한 후보를 국회에 보낸들 혼자서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리 국회의 물갈이 비율이 결코 낮지 않은데도 '동물국회'와 '대결정치'가 지속되는 이유이다.

결국 인물검증은 유권자가 맡기보다 정당이 맡거나 민주적 공천과정에 맡기고 유권자는 정당투표에 집중하는 것이 자신이 의도하였거나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선거결과를 훨씬 더 기대하기 쉽다. 정당투표를 중심으로 한 비례대표제가 지속적으로 확산되어온 이유다.

지역이냐 계층이냐?

이런 점에서 지역단위로 선거구를 나누고 각 선거구에서 1등만을 당선시키는 현재의 지역중심 제도는 오늘날 정당중심적 민주주의의 현실에 어긋나는 선거제도인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유권자가 던진 한 표의 의미가 실제 정치과정, 특히 의정과정에 반영되는데 극히 편향적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상당수 유권자의 표는 의석배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죽은 표가 된다. 죽은 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사와 이익에 제일 부합하는 후보나 정당에게 투표하지 못하고 당선가능성이 높은 후보 가운데 차선이나 차악을 뽑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비정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도와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의 현실에선 총선에서만이라도 '지연(地緣)'의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민생을 챙기는 관건은 친기업이냐 친노동이냐, 친대기업이냐 친중소기업이냐, 친산업이냐 친소비자냐, 재난체계나 보건의료의 공공성강화냐 민영화냐, 교육이나 언론의 공영화냐 사영화냐를 선택하는 문제이지 지역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지역대표의 문제는 지방분권을 강화해서 해결해야지, 중앙정치에 지역중심으로 판단해서는 원하는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

결국 선거를 통해 공동선에 충실하거나 이익정치현실에서 계층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지역투표보다는 계층투표나 직능투표를 고려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21대 총선에 나선 후보들 분포를 보면 2030세대를 대변할 청년 후보들이 거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사진= 연합뉴스
21대 총선에 나선 후보들 분포를 보면 2030세대를 대변할 청년 후보들이 거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정권심판이냐 야당심판이냐?

마지막으로 총선의 심판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정략적으로 어느 정파에 유리하냐를 고려해서 정권심판이냐 야당심판이냐를 따지는 것은 유권자의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그건 선택받기 위해 안달이 난 정당이나 후보의 당략이나 선거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억압적 선거법제 하에서도 유권자가 주어진 선택권을 최대화 할 수 있는 것은 심판의 중심점을 분명히 잡는 것이다.

대통령제 정부형태에서 대통령을 국정의 중심이라고 보는 것은 독재적 대통령제의 잘못된 유산이다. 정부형태는 집행권을 행사하는 권력의 민주적 정당성을 국민이 직접 결정할지(대통령제), 국민의 대표자가 간접적으로 결정할지(내각제)의 구별일 뿐이다. 정권심판은 현행 체제에서는 대통령선거에서 하는 게 정석이다.

민주공화국에서 국정의 최고결정권자는 정부형태의 차이에 관계없이 국민대표기관으로 모든 권력행사의 기준인 법률을 제정하는 국회이고 이 국회를 움직이는 정당이다. 국회의원 선거를 뽑는 총선의 일차적 심판대상은 당연히 국회와 정당이지, 법에 따라 이차적으로 집행을 담당할 뿐인 정부가 아닌 것이다. 코로나19 재난긴급지원이든 N번방특별대책이든 국회가 결정해주지 않으면 근본대책을 마련할 수 없지 않는가?

물론 정당중심 민주제하에서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또한 정당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정당심판의 연장선에서 정권심판도 해야 한다. 그러나 정권심판은 총선의 심판대상인 국회와 정당에 대한 심판의 종속변수이지 그 자체가 독립변수일 수 없는 것이다. 정권심판이 총선에서 독립변수고 핵심이라면 당사자인 대통령도 선거과정에 참여해서 자기주장을 할 수 있어야 공정하지 않겠는가? 대통령에게 선거개입한다고 비판하면서 심판대상은 대통령이라는 건 모순이지 않는가? 결국 유권자에게 총선에서의 중요한 판단기준은 촛불혁명의 전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을 제외하고는 최악의 의정을 낳았던 제20대 국회에 대한 평가이자 국회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정당들에 대한 심판이다.

참혹한 결과에 크든 작든 책임이 있는 모든 주요 정당을 깡그리 심판할 수도 있고, 그 중에 옥석을 가려서 발목잡기 대왕이 된 야당 심판이냐 협치를 소홀히 한 여당 심판이냐를 선택할 수도 있다.

필자는 현행 선거제도상 사실상 불가능한 깡그리 심판이라는 어설픈 희망고문에 휩쓸리기 보다는, 오십보 백보지만 그래도 최악을 보여준 정당을 심판하는데 귀한 한 표를 행사할 것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시민들에게 권하고 싶다. 민주공화제 100년의 역사는 그렇게 더디지만 알찬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이룩된 것이기에.

●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서울대 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경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 현재 한국언론법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공법학회·한국헌법학회 부회장,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부위원장,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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