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 이야기] 김시덕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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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 이야기] 김시덕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0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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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 칼럼니스트] 김시덕의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지역 답사를 즐겨 하는 이들에게 참고서가 될만한 책이다. 김시덕은 문헌학 연구에 쓰이는 방법론을 적용해 지역을 해석한 활동으로 지역 답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책 제목으로 쓰인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다소 직관적이다. ‘문헌학’의 시각으로 ‘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기존에 저자가 낸 답사 관련 책들은 서울이나 수도권 등 특정 ‘지역’에 주목했다. 그랬던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한국’, 즉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국인의 생활 공간 혹은 영역에서 벌어진 변화와 현상들에 주목했다. 그리고 해석한다. 

문헌학의 방법론으로 해석한 다양한 공간

저자 김시덕은 문헌학자다. 문헌학(文獻學, philology)은 종이, 나무, 돌, 쇠 같은 물체에 적힌 글을 읽어 세계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문헌학자인 저자는 도시를 답사하며 “평범해 보이는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리하여 세상을 새로이 읽기 시작한다”고 고백한다. 즉 문헌학의 방법론으로 도시를 읽는다는 것.

저자는 1부 ‘산책하며 발견하는 현대 한국’에서 간판, 문화주택, 시민 예술, 화분과 장독대, 냉면과 청요리와 누룩, 민가, 개량 기와집, 공동주택, 아파트,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 철도, 버스 정류장 등의 답사 포인트를 안내한다. 사람들이 평소에 마주칠법한 평범한 풍경이다. 

하지만 저자는 평범한 도시 풍경 속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며 가장 먼저 ‘간판’을 소개한다. 그만큼 간판은 사람들 눈에 자주 뜨이는 문물이다. 반면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간판에서 저자는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우선 간판에 쓰인 글자의 맞춤법이나 글씨체에서 그 가게의 연식을 짐작할 수 있다. 컴퓨터를 세탁소 이름에 넣는 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는데 간혹 컴퓨터(Computer)의 오래전 한글 표기법인 ‘콤퓨터’로 쓰인 간판이 그렇고, 마켓(Market)을 ‘마켙’이나 ‘마켓트’처럼 예전 표기법으로 쓴 간판이 그렇다.

쌀집 간판에서도 연식을 짐작할 수 있다. 간판에 ‘양곡 매매업 허가 번호’가 있다면 1972년에서 1999년 사이에 문을 연 쌀집이다. 양곡관리법에 의해 양곡 매매업 허가제가 시행된 때가 1972년이었고 등록제로 바뀐 게 1999년이었기 때문이다. 

저자 김시덕은 그의 저술에서 ‘도시 화석’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도시의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는 화석 같은 존재라는 의미에서다. 이 책에서는 버스 정류장을 두고 ‘도시 화석’이라는 표현을 썼다. (지금은 없어진) 예전 시설의 이름을 간직한 정류장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점에서 필자도 도시 화석으로서의 버스 정류장을 목격한 적이 여러 번이다. 서울의 마을버스를 탔을 때의 경험이다. 

명륜동 고지대를 운행하는 마을버스의 정류장에 ‘명륜시장’이, 홍은동을 운행하는 마을버스 정류장에 ‘홍은동 국민주택’이, 홍제동 개미마을을 운행하는 마을버스 정류장에 ‘삼거리 연탄가게’가 있지만, 현재 그곳에 정류장 이름으로 쓰인 시설은 없다. 다만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으로 옛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 점에서 ‘도시 화석’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듯하다.

문명 충돌이 일어난 현대 한국

2부의 제목은 ‘현대 한국에서 일어난 문명 충돌’이다. 저자는 2부에서 한국 정부가 국가 현대화를 꾀하며 농촌과 비농촌을 어떻게 다뤘는지, 그러한 개발 과정에서 도시와 비도시를 어떻게 차별했는지 이야기한다. 

1부에서 도시 안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답사 포인트와 방법론을 제시했다면, 2부에서는 도시 바깥 지역으로 시각을 옮겨 문명사 관점에서 현대 한국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풀어 이야기하면, 농민 대 어민, 그리고 농민 대 화전민, 나아가 도시 대 농촌 등 이 땅에서 치열히 부딪혀 온 집단 간, 혹은 세력 간에 벌어진 일들을 문명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저자는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의 공업화를 두고 '국토 개조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그 과정에 ‘지도가 달라졌다’라거나 ‘국토가 넓어졌다’라고 평가받는 간척 사업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진행돼온 대규모 간척 사업은 60년대 들어서 더욱 가속화됐는데 저자는 대규모 토건 사업에 대해 “한반도 남부 지역을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형태로 개조했다"고 평한다. 

간척은 처음에는 식량 자급에 목적이 있었고 나중에는 중공업 국가 건설에 목적이 있었다. 바다를 메워 농지를 만들고 산업공단도 만들었다. 하지만 간척은 주로 갯벌, 즉 해안선을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어민들의 반발이 컸고, 이를 농토로 만들려는 농민 세력과 충돌이 있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농민과 비농민이 충돌했다는 것. 

이 책에서 저자가 사용한 ‘농민’이라는 표현은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보다는 농사를 최우선시하는 ‘한국의 농업적 세계관’을 의미할 때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서산의 간척지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한 ‘현대 정주영 회장’을 한국의 농업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농민’의 사례로 들기도 했다. 

화전민이 사라진 과정도 비슷한 맥락이다. 남한의 산들은 푸르름을 자랑한다. 1970년대부터 ‘산림녹화’ 사업이 적극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산림녹화 사업을 화전민과 농민의 갈등 측면에서 분석했다. 즉 산속의 나무를 태운 땅에 농사를 짓는 화전 문명이 산 아래 평지에서 농사를 짓는 농업적 세계관과 부딪혀 농민에게 예속되며 사라졌다는 것이다.

분단된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감시가 쉬운 도시나 농촌이 아닌 산속에 사는 주민은 불안 요소로 여겨질 수도 있다. 강원도의 산악 지역으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 군인들이 화전민들에게 접근했던 과거를 보면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복 어린이’로 유명한 1968년의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한국 정부는 한국의 산에서 화전민을 없애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른바 ‘화전 정리 사업’이었다. 그 후 남한에서 화전민이 사라졌는데 이를 두고 저자는 "농업 중심적 세계관과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라는 두 요인에 원인이 있다"고 해석했다.

이렇듯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한국이 근대를 지나 현대로 진입하면서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하며 더 강한 세력에 예속되어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비도시 지역이 도시 지역으로 변하는 모습을 저자 특유의 시각으로 풀어 이야기한다.

일상이 탐험이 되는 도시 답사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은 두 권으로 출판됐다. 베스트셀러 '서울 선언', '갈등 도시', '대서울의 길' 등을 포함해 저자 김시덕이 낸 일곱 번째 도시 답사 관련 책이다. 

저자의 미덕은 도시 답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점에 있다. 그곳의 역사와 관람기를 기술하는 거에 그치지 않고 대상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그가 쓴 책들의 독자 리뷰를 보면 도시 답사에 관심 두게 되었다는 취지의 감상평을 흔히 볼 수 있다. 

저자는 그런 독자들에게 지역 답사를 독려한다. 더 많은 이가 답사할수록, 그리고 이들 각자의 새로운 시각이 더해질수록 지역은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도시화를 추구하며 빠르게 변하고 있어서 지역 답사는 더욱 중요하다. 어쩌면 어제 걸었던 골목길이 오늘 사라질 수도 있는 현실이다.

지역 답사 혹은 지역 탐사를 시작하고픈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이 책부터 읽어보면 어떨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답사 방법론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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