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8월 10일] 도시빈민의 절규, 광주대단지사건

1970년대 도시철거민의 생존권 투쟁…도시빈민운동의 시발점 김인영 기자l승인2018.08.0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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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엔 5만여명의 주민이 몰려 들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11시에 주민대표와 양택식(梁鐸植) 당시 서울시장이 면담하기로 예정된 시간에 앞서 그들은 ‘배가 고파 못살겠다’, ‘일자리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웅성거렸다. 양 시장은 약속시간에 오지 않았다. 그러자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약속시간보다 30분이 지나 양 시장이 도착했을 땐 이미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분노한 주민들은 관리사무소, 출장소를 불태우고 차량 20대를 불태웠다. 전투경찰 700명이 투입되었지만, 저지하지 못했다. 첫날은 경찰과 5시간 대치했다.

주민들은 폭도화되었다. 광주대단지를 초토화시킨 후 주변을 지나가던 승용차, 택시, 버스들을 가로막아 멈춰세운 뒤 탑승객들을 모조리 끌어내고 탈취했다. 그들은 그 차량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시위는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내무부 차관과 경기도지사를 현장에 보내 주민들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 아울러 주민대표들에게 정식 사과하고 이주민들을 달랬다. 8월 12일 양택식 서울 시장은 담화를 통해 광주대단지(성남출장소)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고,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했다. 이로써 시위는 3일만에 진정되었다. 성남시는 그후 1973년 시로 승격되었다.

이 사건을 광주(廣州)대단지사건이라 부른다.

 

▲ 1971년 8월 광주대단지 시위

 

1960년대엔 경제개발과 함께 농촌 사람들이 무작정 상경했다. 농촌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서울에서 노동이라도 하는 게 나은 시절이었다. 도시가 급격히 팽창했다. 1960년 28%이던 도시인구 비율이 1970년에 41%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서울 인구는 1955년 157만명에서 1960년 244만명, 1966년 379만 명, 1970년대 들어 500만명을 넘어섰다.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자 서울 여기저기에 무허가 판자촌이 빠르게 늘어났다. 농촌을 떠나 서울로 온 사람들은 달동네에 살았다. 나뭇조각, 베니어합판으로 지은 판잣집이 낙산, 인왕산, 남산 기슭, 청계천 주변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 서울 봉촌동 판잣집 /자료사진

 

서울시는 단속과 철거를 계속하면서 도심 인근의 판자촌 주민들을 서울 외곽의 새로운 정착지에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처음엔 미아리에 집단 정착촌이 생겼고, 1970년에 서울 외곽에 20곳의 정착지를 마련했다.

정부는 무허가주택을 현지 개량하고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어 이주시킨다는 계획으로,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 35만평에 10만명이 살 대단지를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서울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곳에 성남출장소를 설치했다.

이때 10만명이 넘는 빈민층 사람들이 살 집을 준다는 말만 믿고 이사를 갔다. 주로 청계천과 서울역, 용산, 영등포 일대에 살던 빈민들이었다. 그들은 '다시는 서울로 이사 오지 않겠다'는 서약을 쓰기도 했다.

서울시는 철거 이주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분양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철거이주민의 분양권이 불법전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중간에서 투기꾼과 업체들이 몰려 철거 이주민 우선 분양권은 외지인에게 넘어갔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이주한 대단지에 살아갈 기초시설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이주민에게 일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곳에는 공장도 없었고 상가 단지도 조성되지 않았다. 버스와 교통편이 준비되지 않아 농촌 버스만이 몇 대 다니고 있었다. 교통수단이 없어 서울에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은 왕래가 어려웠다.

빈 터에 무작정 내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도시설이나 화장실조차 제도로 갖춰지지 않았다. 행정당국은 주민들의 불만을 들어줄 생각도 않았고, 서울에선 사람들이 대책없이 떠나야 했다.

이 사건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양산된 도시 빈곤들이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폭력화한 집단 시위였다. 당시 재야민주화세력과 연계되지도 않은 자연발생적 일종의 봉기였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빈민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도시빈민운동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도시빈민 운동은 조직화되었다. 성남, 용인 일대의 사회운동세력이 힘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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