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㊲ 일본식 주택 양식이 남아 있는 후암동
상태바
[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㊲ 일본식 주택 양식이 남아 있는 후암동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10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조선이 외국에 개항한 19세기 말 이후 남산 일대는 일본인 거류민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 됩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남산 일대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은 물론 일본식 종교 시설인 신사까지 들어섰지요. 

일본인 거류민들이 남산 일대에 자리 잡았던 이유는 우선 조선인 주류가 자리 잡은 북촌보다 땅값이 저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경제적 이유 외에 역사적, 정치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남산의 북쪽 자락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마쓰다 나가모리’의 부대가 주둔했던 역사가 있어 일본인에게는 의미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 공사관과 가까워 신변 보호와 안전에 유리하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그런 남산자락 일대는 일제강점기가 깊어지면서 더욱 번창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고급 주택단지로 개발

그 중심에 고급 주택 단지로 개발된 후암동이 있습니다. 후암동이 새로운 주거 공간으로 뜬 이유는 위치와 환경 덕분입니다. 최초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정착한 남산의 북쪽 자락은 북향이라 채광과 보온에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거주 환경이 좋은 주택지를 찾게 되었는데 후암동 일대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후암동은 경성 도심과 가까운데다 남산자락이라 풍광이 좋았고 무엇보다 남향의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찾던 건강한 동네였지요.

후암동의 일본식 주택. 사진=강대호

후암동(厚岩洞)은 ‘두텁바위’로 불리는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가 마을에 있던 데서 유래된 동네이름입니다. 후암동 일대를 지나는 도로인 ‘두텁바위로’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삼판동(三坂洞)으로 불린 후암동은 191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남산자락의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구릉지가 많은 이곳을 1920년대부터 일본인이 주택 단지로 개발했습니다. 후암동 중앙을 가르는 후암로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조선은행 사택단지가, 서쪽에는 경성의 3대 주택지로 꼽히던 ‘학강(鶴岡) 주택지’가 조성되었지요. 

조선은행 사택단지는 지금의 후암동 244번지 일대에 있었습니다. 남대문 근처 조선은행 본점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서울역에서도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고 지금의 한강대로에는 남대문과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도 있어서 교통의 요지였지요.

조선은행 사택단지를 연구한 문헌들을 참고하면 사택은 총 23동 35호였습니다. 사택 크기는 직급에 따라 7가지로 나뉘었는데 한 호당 26평에서 82평으로 단독주택형과 연립주택형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합숙소도 있었지요. 

이들 자료에 따르면 조선은행은 후암동 일대에 약 2만 평의 땅을 소유했는데 그중 약 1만 평을 사택지로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사택단지에는 다양한 편의 시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놀이터와 테니스코트가 조성되었고, 남산에서 내려오는 개울가 옆으로는 스케이트장도 있었다고 하네요.

사택단지 인근에는 학교도 여럿 있었습니다. 지금의 삼광초등학교인 삼판소학교, 용산중학교, 그리고 나중에 수도여자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는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도 있었습니다.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수도여고 자리에는 서울시 교육청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해방 이후 조선은행 사택들은 단체나 일반인에게 매각되었지만, 그중에는 (조선은행에서 이름이 바뀐) 한국은행 관계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택 건물들은 200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다세대 주택이나 상가 건물로 재건축되었습니다.

과거 사택 건물들은 이제 없지만, 이 일대는 조선은행 사택단지의 전통을 계승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택단지가 있었던 후암동 244번지에는 ‘한국은행 직원 공동숙소’로 등록된 지번이 여럿 있는데 그 지번들이 포함된 대지 안에 2006년에 준공된 ‘한국은행 직원 공동숙소 후암 생활관’ 건물이 있습니다. 

후암동의 일본식 주택. 사진=강대호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였던 '학강'

‘학강’ 주택지는 장충동의 ‘소화원’, 북아현동의 ‘금화장’과 더불어 경성의 3대 주택지로 꼽히는 곳이었습니다. 후암로 서쪽 일대에 자리한 학강 주택지는 1925년부터 3차에 걸쳐 개발되었습니다. 

당시 건축 경향을 연구한 문헌들을 보면 학강 주택지를 ‘외래 주거 양식이 보급된 개발지’라고 평가합니다. 1920년대로서는 최신 양식의 디자인과 구조, 그리고 새로운 재료에 대한 실험이 학강 주택지에서 시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 경관의 변화까지 끌어냈다고 하네요.

학강 주택지가 개발되기 전에는 그 일대가 구릉지대였는데 이러한 자연적 구조를 이용해 집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주택 단지의 모양이 격자형이 아닌 구릉을 따라 굴곡졌습니다. 오늘날 학강 주택지가 있던 골목은 그 경사와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학강 주택지가 있던 곳을 돌아다녀 보면 비교적 최근에 지은 다세대 주택이나 건물도 있지만 오래전에 건축한 주택들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학강 주택지 개발 즈음인 1920년대나 30년대에 지은 집들도 있는데 일본식으로 재해석된 서양식 주택인 ‘문화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후암동 주민들은 이러한 문화주택을 ‘오카베집’, 혹은 ‘적산가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카베집은 목조를 기본으로 외벽에 회를 칠한 구조의 집을 일컫습니다. 후암동 골목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일본식 목조 주택의 구조를 가진 집들을 꽤 볼 수 있는데 후암동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후암동은 남산에 조성된 일본식 종교 시설인 조선신궁으로 가는 입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384개의 계단이 시작하는 곳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일제강점기 말기 남산에는 경성호국신사도 들어섰었습니다.

경성호국신사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전사자가 늘어나던 1943년에 일제가 ‘호국 영령을 추모한다’는 명목하에 만든 시설입니다. 용산의 일본군 기지와 가까운 남산에 신사가 들어섰는데 고지대여서 계단을 진입로로 삼았습니다. 

후암동 108계단. 사진=강대호

그 흔적이 ‘후암동 108계단’입니다. 용산중학교에서 해방촌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지요. 그러고 보면 ‘후암동 108계단’은 해방촌 탄생과 연관 깊습니다.

해방 후 폐지된 경성호국신사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살게 되었는데 그 일대가 해방촌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분단 후 월남민은 물론 고향을 떠난 이들이 들어와 살며 해방촌은 서울의 대표적 서민 주거지가 되었던 거죠.

그렇게 70여 년을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하던 ‘후암동 108계단’에는 2018년에야 승강기가 설치되었습니다. 승강기는 주민들에게 편리함을, 해방촌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이색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해방촌과 그 일대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하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