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㉟ 경기도청이 광화문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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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㉟ 경기도청이 광화문 앞에 있었다?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2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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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광화문은 서울을 상징하는 장소 중 한 곳입니다. 어쩌면 한국 하면 떠오르는 건축물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광화문이 경기도에 속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광화문 바로 건너편에 경기도청 건물이 있기도 했고요.

사실 지금의 경기도청 격인 경기감영은 조선시대에 한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돈의문(서대문)을 나서자마자 있었는데요, 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과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사이를 말합니다. 도성 바깥이었지만 엄연히 성저십리에 속한 한성부였지요.

그런데 경기도를 다스리는 관청이 왜 한성부에 있었을까요. 관련 자료를 참고하면 지방의 농사를 파악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때 경기도를 기준으로 삼았고, 한성부 방위에 경기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경기감영을 수도 가까운 곳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돈의문 밖 경기감영은 1896년에 수원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며 그 자리에 병원이 들어서는 등 지금은 경기감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옛터 인근인 서대문역사거리의 한 건물 지하에 ‘경기감영 터’를 발굴한 기록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한편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직후인 1910년 8월 조선의 왕도(王都)였고 대한제국의 황도(皇都)인 한성부를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했습니다. 지금의 특별시나 광역시처럼 독립적 지방행정 단위였던 한성을 경기도에 속한 도시로 만들어버린 거죠.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경기도청 소재지를 수원에서 경성으로 옮겨버립니다. 

한성을 경기도내 도시로 격하한 조선총독부

도청이 들어서려면 청사가 필요한데 마침 대한제국이 짓고 있던 관청 건물이 광화문 바로 건너편,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옆에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은 1907년에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의정부 건물을 헐고 내부(內部) 청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1910년에 완공된 그 건물을 경기도청으로 전용했습니다. 

광화문 바로 앞에 있었던 경기도청 건물. 1930년대의 사진엽서.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해방 후 서울은 서울특별시가 되며 행정적으로 경기도에 속했던 시절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경기도청은 1960년대 중반까지 광화문 앞에서 그 기능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경기도 행정을 상징하는 도청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있었으니 여러모로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경기도의 주요 도시들이 도청 유치 운동을 벌였습니다. 대한제국 시절 경기감영이 있었던 수원은 물론 인천도 그 대열에 합류했지요. 당시 인천은 직할시나 광역시가 아닌 경기도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참고로 인천이 직할시가 된 건 1981년이었고 광역시가 된 건 1995년이었습니다.

결국, 1963년에 수원이 새로운 경기도청의 소재지로 결정되었고, 1967년에 신청사가 완공되자 경기도청은 수원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1980년에 촬영한 광화문 일대. 경복궁 경내에 있던 중앙청 건물과 광화문 맞은편으로 빨간 벽돌벽의 근대 건축물인 옛 경기도청 건물이 보인다. 현재 ‘의정부 터’ 복원 공사가 진행되는 곳이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그 후에 광화문 건너 옛 경기도청 건물은 치안본부 청사로 사용한 시기가 있었고 잠시 서울시 경찰국 별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건물은 1989년에 철거했는데 빨간 벽돌벽이 인상적인 근대 건축물이었습니다.

빈터가 된 옛 경기도청 자리는 한동안 가로공원과 주차장으로 이용되다 1998년부터 ‘시민열린마당’이라는 작은 광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옛 의정부터를 발굴 조사했고 주요 건축물과 시설 등에 관해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한편 역사문화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2020년 의정부 터는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58호 ‘의정부지’로 지정되었고 몇 달 전에는 시민들에게 발굴 현장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 현장이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바로 옆 필지에 자리한 가림막이 처진 공사장입니다.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의정부 터. 옛 경기도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사진=강대호

의정부 터가 역사문화 공간으로 어떻게 조성될지도 궁금하지만 헐려버린 빨간 벽돌벽의 경기도청 건물의 운명이 아쉽기도 합니다. 보존 가치가 없던 건물이었을까요. 물론 서울시 측에서는 의정부 터를 발굴하며 옛 경기도청 건물의 흔적도 함께 찾을 계획이라고는 했습니다. 

이렇듯 광화문 앞길의 모습은 세월이 흐르며 바뀌어 왔지만 600년 넘도록 국가 권력의 상징인 건 변함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국가 권력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선전의 장으로 광화문 앞길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권력의 정통성 강화수단으로 활용된 광화문

특히,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이 약했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단결을 고취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의 기념물 조성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 시작이 1964년에 추진한 ‘애국선현 37인 석고상’ 건립이었습니다. 당시 이 사업으로 광화문 앞길, 즉 중앙청에서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대로 중앙에 37개의 석고상을 배치했지요. 이 작업에 서울대, 이화여대, 홍익대, 서라벌예대(지금의 중앙대) 등 4곳의 미술대학이 참여했고 작업 기간은 2개월 정도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 광화문 앞 대로에 설치된 ‘애국선현 37인 석고상’.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물 촬영

결과적으로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작업 기간이 짧아 졸속으로 제작되어 엉성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고, 습기 등 환경에 민감한 석고상이 변색하고 망가지기도 한 거죠. 광화문 한복판의 흉물이 된 석고상들은 결국, 1966년에 전면 철거됩니다. 

2021년 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공간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광화문’ 전시회에서 당시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요, 지금은 ‘온라인 전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이순신 장군 등 애국선열 동상 건립 운동입니다. 석고상들이 철거된 1966년에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조직되어 서울을 중심으로 방방곡곡에 역사적 위인들의 동상 건립 운동을 벌였습니다.

위원회에 정부와 민간 측 인사가 고루 참여했지만, 김종필 등 박정희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위인 동상 건립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박정희 정부의 통치 이념을 선전하는 장이 되어버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은 광화문 앞길에 세운 이순신 장군 동상에 있습니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 내내 이순신 장군을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꼽았습니다. 현충사도 성역화한 박정권은 이순신 장군을 국민적 모범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러니 박정희 정권은 광화문 앞길이라는 상징성 있는 공간에 전 국민의 모범인 이순신의 동상을 설치함으로써 애국주의를 고취하고자 한 거죠.

하지만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이순신 동상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은 현실입니다.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 항복한 장수로 비칠 수 있고, 이순신의 얼굴이 표준 영정과 다르고, 갑옷이 발목 아래까지 내려와 전투 지휘관의 모습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등이 지적되었지요. 

이 때문에 동상을 새로 제작해야 한다거나 다른 데로 이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0년 보수를 위해 동상을 잠시 옮기긴 했어도 지금껏 광화문광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광화문광장은 지난 수년간 모습을 여러 차례 바꿨습니다. 말 그대로 광장의 모습을 한 시절도 있었고 공원처럼 변한 시절도 있습니다. 그런 광화문광장은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광화문광장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미래에는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해집니다.

광화문과 광화문광장. 사진=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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