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㊱ 국치일에 걸어본 남산 ‘국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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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㊱ 국치일에 걸어본 남산 ‘국치길’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03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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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지난 8월 29일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아마도 무슨 날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1910년 8월 29일로 연도를 붙여보면 아, 하고 그날을 떠올리는 분들이 꽤 있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지난 8월 29일은 누군가에게는 한일합방, 즉 조선과 일본이 한 나라로 합쳐진 날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국권피탈이 시작된 ‘국치일’입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옛 서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남산 일대가 크게 변했지요. 조선 시대에 소시민이나 주로 살던 남산 자락에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와 살았고 일제 식민 통치기구는 물론 일본의 종교 시설인 신사(神社)까지 들어섰으니까요.

그때 흔적을 ‘국치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국치길’은 과거 일제 관련 시설이 있던 남산 자락 약 1.7km 구간에 조성된 길을 말합니다. 이 길 곳곳에 자음 ‘기역’을 모티브로 ‘국치길’이라 쓴 보도블록이나 표지판으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남산 자락의 보도에 설치된 ‘국치길’ 안내. ‘국치길’은 과거 일제 관련 시설이 있던 남산 자락 약 1.7km 구간에 조성된 길이다. 사진=강대호

남산 자락 1.7km 구간에 조성

‘국치길’의 시작은 명동 근처 ‘남산예장공원’에서 시작합니다. 이 공원에는 총독부 관사 터가 있습니다. 이곳에 조선총독부 관사가 있었던 이유는 가까운 곳에 조선총독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원 앞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맞은편의 작은 길을 잠시 오르면 ‘기억의 터’라고 쓰인 표석이 나옵니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공간인 ‘기억의 터’는 옛 통감관저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통감부는 을사늑약 후 일제가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통감부는 1906년 2월 설치되어 1910년 8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구입니다. 

통감관저 표석에는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강제병합’ 조약은 8월 29일에 공포되었습니다. 

예장공원에서 소파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총독부 청사 터가 나옵니다. 원래는 통감부 청사였는데 1910년 8월 총독부 체제가 되자 총독부 청사로 쓰였습니다. 이곳의 총독부 청사는 1926년 경복궁 경내에 들어선 청사, 즉 옛 중앙청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쓰였지요.

통감관저 터 옆에 자리한 ‘기억의 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장소이다. 사진=강대호

해방 후 통감부 터 혹은 총독부 청사 터에는 여러 용도의 건물이 들어섰는데 1980년대와 90년대에 ‘국가안전기획부’ 부속 건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쓰이다가 재건축이 결정돼 지금은 가림막이 쳐진 공사 현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곳이 조선총독부 청사 터였다는 걸 보여주는 흔적은 좁은 보도에 설치된 ‘국치길’ 안내 표지판과 공사장 가림막에 붙어 있는 ‘의열단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100주기 기념’ 포스터입니다. 1921년에 폭탄 투척이 있었으니 아마도 2021년에 붙인 걸로 보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 터 바로 앞에는 리라초등학교와 숭의여자대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에도 일제의 흔적이 있습니다. 

리라초등학교 외벽을 따라 돌아가면 ‘남산원’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이 나오는데 러일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일본군 장성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노기 신사’가 있던 곳입니다. 당시에 쓰인 석물이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경성신사 터. 숭의여자대학교 교정 안에 있다. 사진=강대호

숭의여자대학교 교정에는 ‘경성신사 터’가 있습니다. 1887년 한양에 살던 일본인들이 ‘남산대신궁’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1916년에 ‘경성신사’로 개칭했습니다. 1925년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선에 있는 일본 신사를 대표했지요.

숭의여대에는 ‘갑오역기념비’도 있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들을 추모하는 이 기념비는 교정의 언덕길 즈음에 있었다던 기록과 흐릿한 사진만 지금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산 자락에 들어선 학교들의 터가 원래는 일본의 종교 시설인 신사와 일본군 전사자들을 기리는 탑이 있었던 자리인 거죠. 그 일대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인 ‘왜성대공원’도 있었습니다.

왜성대공원은 1897년 일본인 거류민단이 남산 북쪽 자락 1만 ㎡를 조선 정부로부터 조차해 일본인을 위한 위락 시설로 조성한 공원입니다. ‘왜성대’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당시 남산 일대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을 기리는 의미였지요. 

‘한양공원’ 표지석과 국치길 표지판. 고종이 직접 ‘한양공원’이라고 쓴 글씨를 내렸다. 사진=강대호

일본인 거류민단은 1910년에 남산 서북쪽 산비탈의 부지 30만 평을 한성부로부터 무상으로 대여받아 또 다른 공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고종은 이 공원에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직접 쓴 글씨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각종 자료에 근거하면 왜성대공원은 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와 리라초등학교 일대에, 한양공원은 지금의 한양도성박물관 일대와 숭례문 일대에 들어선 걸로 보입니다.

숭의여자대학교 앞에서 소파로를 따라 돈가스 식당들과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을 지나면 한 표지석이 나옵니다. ‘한양공원’이라 쓰여 있는데 ‘국치길’이라 쓰인 표지판도 함께 있습니다. 고종이 썼다는 ‘한양공원’ 글자가 뚜렷한 전면과 달리 후면은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네요. 

조선신궁 항공사진. 384개의 계단이 있었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김삼순 계단'은 조선신궁으로 오르는 계단

한양공원 표지석을 지나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덕분에 유명해진 계단이 나옵니다. 원래는 조선신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조선신궁을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길게 이어지는 계단이 보이는데 모두 384개의 돌계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명 ‘삼순이 계단’을 오르면 네 여성을 형상화한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마중 나옵니다. 조형물의 네 여성 중 세 명은 한국, 중국, 필리핀 소녀를 상징하고 다른 한 명은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를 상징합니다.

이 기림비가 자리한 곳 일대에 ‘조선신궁’이 있었습니다. 조선신궁은 1925년 남산 구간의 한양도성을 허물고 들어섰습니다. 그 옆의 한양도성박물관에서 관련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요.

조선신궁은 일제가 조선 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웠습니다. 게다가 신궁(神宮)이라는 가장 높은 사격(社格)을 가진 신사(神社)라고 합니다. 모두 15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흔적은 일반인들이 참배하던 배전(拜展) 터가 유일합니다. 

조선신궁 터와 가까운 곳에는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동상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안중근 광장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백범광장이 나오는데 김구 선생의 동상도 서 있습니다. 

이렇듯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있는 장소에 독립투사를 모티브로 한 기념물들이 들어선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식민 지배를 벗어난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러고 보면 눈에 보이는 흔적을 싹 치운다고 해서 그 잔재까지 사라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중요한 건 정신과 마음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되는 시절입니다. 역사는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이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세월의 시공간 속에 담긴 진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조선신궁 터에 있다. 오른쪽 세 여인은 한국, 중국, 필리핀의 소녀를 상징하고 왼쪽 여인은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를 상징한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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