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민족의 원류 형성한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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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민족의 원류 형성한 위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0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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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초석 이루고 수많은 종족과 민족 통합

“기자 출신이 무슨 역사책을 쓴다고 덤비나. 그런 일은 역사학자에게 맡겨야지.”

필자가 신라 이사부 장군에 관해 책을 저술하겠다고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논했을 때 자주 들은 핀잔이었다. 그러면서 중도에 접을까도 했다. 하지만 이사부 장군을 파면 팔수록 흥미로웠다. 흥미와 관심은 어떤 결과를 향해 달리게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신라장군 이사부를 찾아 나섰다. 10년쯤 됐을 것이다. 경주에 몇 주일씩 머물면서 고대왕국 신라의 향취에 젖기도 하고,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이사부 장군의 이름이 새겨진 ‘단양적성비’를 감상하기도 했다. 이사부가 활약하던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과 김해 금관가야 유적지도 가봤다. 뭔가 그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범선 ‘코리아나호’를 타고 독도와 울릉도를 방문했다. 고향이 삼척이어서 이사부기념사업회 멤버로 참여하며 이사부에 대한 탐방과 추념활동에도 참가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도 몇 번씩 읽어 보고, 이사부와 관련한 전설 등도 모았다.

▲ 이사부장관 국가표준영정 /삼척시청 소장

필자가 추적한 이사부 장군은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고 자료를 모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이사부가 정벌해 새로이 신라 영토로 흡수한 곳에 실직국, 우산국, 예국, 맥국, 금관국, 대가야, 왜국 등의 잔영이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삼국의 영토 분쟁 와중에 이름 없이 사라진 왕국들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사료는 극히 희박하지만, 전설까지 참조하며 삼국의 틈바구니에서 잃어버린 왕국의 모습도 살려보고자 했다.

 

이사부는 삼국 중 가장 약체였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도록 징검다리가 된 인물이다. 필자는 이사부 장군이 없었다면 신라의 통일이 이뤄질 수 없었다고 감히 단언한다. 백전백승의 이사부 장군은 변방의 신라를 한반도의 중심무대로 이끌어 냈다. 그가 있었기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고, 고려와 조선, 그리고 오늘날 한민족의 토대가 형성됐다.

많은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이사부가 우산국을 신라 땅으로 만들어 대한민국에 울릉도와 독도를 안겨 준 장군으로 새겨져 있다. 일본이 수시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그때마다 가수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이 울려 퍼지고, 노랫말 끝에 ‘신라 장군 이사부’를 외다시피 하다 보니, 이사부는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장군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사부는 이 <독도는 우리땅>의 주인공을 넘어서는 업적을 갖고 있다. 경상북도 동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확대시키고, 김유신 장군, 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김법민이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우뚝 서도록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외적의 침입에 나라를 구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장군 등을 우리는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사부 장군은 고구려, 백제를 격퇴하고, 가야, 예, 맥, 옥저, 말갈, 왜 등 1500년 전 우리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국을 흡수하거나 영토 밖으로 내쫓은 인물이다.

오늘날 이순신, 장보고에 대한 연구와 홍보는 많이 이뤄져 있다. 하지만 동해를 내해로 만들고 신라를 소백산맥 너머로 진출시켜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이사부 장군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해가 미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이사부 장군에 관한 서적은 희귀한 편이다. 관련 소설은 몇 권 나와 있지만, 우산국 정벌에 관한 설화적 스토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그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그리지는 못했다. 최근 이사부에 대한 사학자들의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그들의 연구에 많이 고무되었다. 아울러 신화와 설화, 현장 답사 등을 아우르며, 이사부 장군의 실체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이사부에 대한 사료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아쉬웠다. 현존하는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것도 몇 줄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 입장에서 기술된 󰡔일본서기󰡕에도 그가 언급되지만, 미흡하다. ‘단양적성비’에 그의 이름이 한 번 거론될 뿐이다. 마치 코끼리의 신체 일부를 겨우 만지는 기분이다. 그가 태어난 시점과 죽은 시점조차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이사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정통 국사학자들은 그 서책을 위서(僞書)로 판단해 정사正史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처럼 희박한 자료 속에서도 이사부의 위대함은 드러난다.

▲ /그래픽=김인영

 

① 지증왕 초(500~505년) - 가야 공략

② 지증왕 6년(505년) - 실직(悉直) 군주 부임

③ 지증왕 13년(512년) - 우산국(于山國) 정복, 하슬라(何瑟羅) 군주 부임

④ 법흥왕 16년(529년) - 금관(金官)가야 정벌

⑤ 진흥왕 2년(541년) - 병부령 취임

⑥ 진흥왕 6년(545년) - 국사 편찬

⑦ 진흥왕 11년(550년) - 적성 전투 승리. 도살성․금현성 전투 승리

⑧ 진흥왕 23년(562년) - 대가야 함락

 

사료에 이사부가 활약한 시기가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실직 군주에 부임한 505년부터 대가야를 함락한 562년까지 57년간이다. 변방의 군주로 파견할 나이는 적어도 성년이 된 20세 전후로 보면 마지막 대가야 전투 시 나이는 77세 전후의 고령이 된다. 그렇다면 지증왕 초 가야 공략에 참전한 시기는 10대였을 것이다. 10대에 장군이 되어 70대 후반의 나이까지 전쟁터에서 산 전형적인 군인이요, 장군이었다.

 

이사부의 성은 신라 왕족인 김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으로서 진골이었다. 그는 소지왕 때 태어나 지증왕과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활약했다. 그는 왕족이지만, 임금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다. 진흥왕 시절에 병부령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사를 편찬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에서 동시에 승리한다. 그는 임금이 되지 못한 한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한을 전장에서 녹여 냈고, 후배들에게 등을 내줘 삼한 통합의 꿈을 실현하도록 디딤돌이 되었다.

이사부는 육상전의 장군(general)과 해전의 제독(admiral)을 겸비했다. 고대사에서 육상 전투와 해상전투를 동시에 지휘한 장수는 많지 않다. 이사부는 신라의 첫 해전인 우산국 정벌에 성공했고, 하슬라(강릉), 금관가야, 대가야,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중류를 점령했다.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 그리고 시인이었던 월터 롤리(Walter Raleigh)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인즉,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마침내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는 것.

개혁군주 지증왕이 20대 초반의 젊은 왕족을 동해의 중심 거점인 삼척에 군사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먼저 동해를 장악하고, 이를 토대로 내륙으로 뻗어 삼한을 통합하려는 의도였다. 백제와 가야가 남쪽과 서쪽 바다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신라는 필연적으로 동해를 장악해야 했다. 동해 한가운데 울릉도엔 우산국이라는 해상 세력이 버티고 있고, 먼 바다 건너엔 왜倭가 수시로 공격해 왔다. 이사부가 동해를 지배함으로써 왜국의 공격을 막고,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며, 해상 교역로를 만드는 이점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사부가 우산국을 점령하고, 동해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 그 이전에 수십 차례 신라를 공격해 온 왜국의 출몰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왜구가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신라 수군이 해상에서 저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차례로 복속시키면서 왜는 남해안에서의 거점을 완전 상실한다. 연대 세력이었던 백제가 멸망하자 왜국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끊게 된다. 결과적으로 삼국시대에 왜가 더 이상 한반도에 위협 세력이 되지 못하게 한 것도 이사부였다.

 

▲ /그래픽=김인영

이사부는 지장(智將)이었다. 군사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전투를 승리했다.

첫째, 10대에 위계(僞計)의 전술로 가야의 땅을 빼앗았다. 전술은 거도(居道)의 계략. 말놀이를 하는 척하다가 군사를 몰아 기습 작전을 펼치는 전략이다. 이사부는 거도의 전술을 채택해 들판에 군사들을 모아 놓고 말놀이를 즐겼다. 이사부는 말을 훈련시키고, 재주를 부리는 놀이에 열중했고, 가야를 공격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 가야는 이사부의 마희(馬戲) 작전에 속았다. 어느 순간에 신라의 무장한 기병이 가야의 본거지를 급습했고, 가야는 굴복함으로써 땅을 내주게 됐다.

둘째, 지증왕 13년, 이사부가 우산국을 공격할 때였다. 그곳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 받기 어려우나, 꾀를 써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으로 다가가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고 알렸다.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했다.

셋째, 진흥왕 11년의 일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해 이사부가 군대를 출동시켜,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

 

최근 들어 이사부에 대한 연구가 부쩍 늘고, 잊혀 가는 신라 장군을 다시 평가하자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강원도 삼척시에서는 이사부 축제가 매년 열리고, 그의 이름을 딴 ‘이사부 광장’도 만들어졌다. 그의 이름을 딴 크루즈선과 과학탐사선이 바다를 누빈다. 독도에는 이사부가 도로지명으로 명명되고, 이사부를 연구하는 학술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필자의 이번 저술도 이사부 장군을 추념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데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이사부를 통해 국토 수호의 의지를 새기는 데 조그마한 기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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