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뉴스=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음악은 아주 오래된 인류 고유의 문화다. 사실 언제부터 음악이라는 것이 존재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음악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 유물들이 대략 5만년 정도 됐다는 점에서 음악의 역사를 5만년 정도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현재 여러 콘텐츠 산업 분야 가운데 가장 먼저 산업화가 된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이다.
음악 산업의 역사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산업 (industry)’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산업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분야에 많은 기능들이 수직적 또는 수평적으로 연계되어 밸류 체인 (value chain)을 구성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모든 산업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음악이나 미술, 공연 같은 무형적인 문화 양식이 많은 콘텐츠 산업 내에서 각 분야들이 산업이라는 타이틀을 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들이 필요하다. 시장 규모나 관련 업체 수 종사자 숫자 같은 정량적 조건들도 필요하지만, 콘텐츠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체계화된 유통 구조가 존재 유무가 더욱 중요하다.
만일 이런 유통 구조가 없다면 산업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미흡한 점이 있다. 유통구조는 일반적인 물류에서 볼 수 있는 중개업의 구조도 있겠지만, 콘텐츠 산업에서는 우선 매체 (media)의 형성이 더 중요하다. 그 간의 콘텐츠 산업의 역사에서 매체의 변화로 인해 산업 구조가 근본부터 변화했던 것들을 보면 매체가 콘텐츠 산업 구조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초기 '음악산업'은 '출판산업'이었다
음악 산업의 형성도 이러한 매체의 생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조금 의외인 것은 음악 산업이 형성되기 시작한 매체는 라이브 콘텐츠가 아닌 출판 콘텐츠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16세기 대중들이 음악을 소비한 방식은 ‘악보’를 사는 것이었다. 악보를 사서 집에 있는 피아노 같은 악기로 이를 연주하는 것이 지금의 음원을 사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전까지 음악은 주로 종교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대중들은 구전 민요 또는 원더링 밴드 (Wandering bands)라 불리는 방랑 밴드들이 마을 광장 등에서 여는 즉석 연주회가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악보도 있었지만 당시의 악보는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고, 당연히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는 성직자나 귀족들의 전유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5세기 중반 이후 인쇄술의 발명으로 악보의 대량 생산이 쉬워지게 되면서 음악은 고급 문화에서 대중들도 즐기는 대중 문화로 변화하면서 음악은 산업화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음악이 인쇄술을 만나 산업화가 되면서 가장 먼저 일어났던 현상 중 눈여겨 볼 만한 현상은 음악 시장의 글로벌화였다. 이전에는 작곡자의 음악은 지역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았고, 확대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악보의 출판으로 인해 독일의 작곡가의 음악을 곧바로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같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던 음악적 스타일이 조금씩 혼합되기 시작했고, 지역색을 벗어나 다양성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 혁명 이후 기차 같은 보다 빠른 운송 수단의 등장은 뮤지션들의 순회 공연을 보다 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음악들이 보다 빠르게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악보 출판사는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음악 산업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지금의 음악 레이블이나 연예 기획사같이 다양한 작곡자와 연주자를 발굴해 여기에서 나온 음악들을 악보로 출판하고 이를 각종 음악 공연이나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전달하는 일종의 ‘유행가’로서 전파하는 데에 악보 출판사의 권위와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런 악보 출판사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스타 작곡자나 연주자들이 ‘의도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소위 말하는 상업적 이익을 동반한 ‘히트’를 치는 노래들이 하나 둘 큰 부를 안겨다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음악은 점점 고도화, 산업화가 돼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초창기의 음악 산업 모습은 들여다보면 지금의 음악 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전까지 음반사들이 그랬고 현재에는 음원사들이 음악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악보 출판사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당시 스타 작곡자나 연주자들의 자리를 지금의 아이돌 그룹들이 맡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악보 출판사들은 기존의 유명한 작곡자나 연주자를 기용해 악보를 발간하는 하는 것보다 적극적인 선(先)투자를 통해 신인 작곡자나 연주자를 발굴해 악보(음원)를 띄운 다음, 악보를 팔거나, 이들을 많은 지역에 순회 공연을 보내 흥행 수익을 챙기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8세기의 산업 혁명과 중산층의 부흥으로 인해 음악을 포함한 문화 수요가 증가해 음악 시장은 규모가 점점 더 커져가기 시작하면서 초창기 음악 산업은 출판과 라이브 콘텐츠를 중심으로 서서히 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축음기의 발명이 가져온 음악 산업의 대격변
음악 산업이 산업적으로 성숙해 가던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Phonograph)를 발명했다. 축음기의 발명으로 인해 음악 산업은 일대 대변혁을 맞이했다. 악보 출판의 가장 큰 단점이었던 ‘라이브’에 대한 제약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 당시 대중들이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은 악보를 사서 직접 연주하거나 주변의 연주가 가능한 연주자의 연주를 듣거나, 흥행사들이 개최하는 콘서트등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즉 음악은 항시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였고, 콘텐츠 자체가 라이브에 휘발성이 가능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 콘텐츠에 대한 소비 비용 또한 높은 편이었다. 음악을 저장할 수 있는 축음기의 발명은 당시의 음악 산업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발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축음기의 높은 가격과 저장 매체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대량 생산이나 개인화의 영역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대신 에디슨은 영화 산업에서 키네토스코프를 전용으로 볼 수 있는 업소를 운영했던 것처럼 ‘포노그래프 팔러(phonograph parlor)’라는 축음기를 들을 수 있는 쇼룸을 1889년 샌프란시스코에 오픈한다.
'포노그래프 팔러'는 고객이 입장하면 동전을 넣으면 작동하는 기계를 배정받고, 고객의 요구하는 별도의 실린더 레코드를 제공했다. 쉽게 말하면 최근의 DVD방 같은 시스템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듯 싶다. 이제 더 이상 라이브로 음악을 듣지 않아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런 시스템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일종의 음악 다방같이 많은 사람들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해갔다. 영화 산업의 니켈로디언 같은 싼 가격도 흥행에 한 몫을 했다. 굳이 비싼 공연장에 가서 티켓을 사지 않아도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이 점 때문에 1890년 중반에는 미국의 대부분의 도시에는 이런 포노그래프 팔러들이 있었고, 얼마 안돼 에디슨의 포노그래프 팔러는 대중들의 편안한 쉼터를 겸하게 됐다.
음원 대량 복제의 길을 연 그라모폰
포노그래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기의 음악 산업은 현재와 같은 대중적이고 개인적인 영역까지 내려오지는 못했다. 이유는 포노그래프가 채택하고 있는 실린더 레코드의 문제였다.
초창기의 에디슨의 축음기는 실린더 속에 홈을 파고 이를 재생하는 종진동 방식의 재생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량 생산이 힘들고, 한번 기록된 실린더는 몇 번 재생하고 나면 다시 새것으로 바꿔야 하는 소모품이었다. 때문에 대량 생산과 복제가 힘들었다.
당시의 녹음 프로세스를 보면 우선 아티스트가 하나의 마스터 녹음을 행할 때 동시에 다량의 실린더 레코드를 동시에 돌려 소리를 기록하는 형태였다. 이런 식으로 복제 가능한 실린더 레코드는 최대 90개~150여개 정도였다. 하지만 미국 곳곳에 포노그래프 팔러가 생기고 나름 ‘인기 곡’들도 생기기 시작하면서 이 공급은 턱없이 부족해졌다. 실린더 레코드가 영구적이 아니라 일정 정도 재생하고 나면 마모되는 소모품이라는 점도 한 몫 했다.
인기있는 아티스트들은 더 많은 실린더 레코드를 생산하기 위해 같은 곡을 말 그대로 수천번씩 연주해야 했다. 이러한 저장 매체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초기 에디슨의 축음기인 포노그래프는 ‘가전(家電)’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중 1887년 에밀 베를리너 (Emile Berliner)가 에디슨 축음기의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한 그라모폰(Gramophone)의 특허를 받게되면서, 비로소 축음기는 음악 산업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갖추게 된다. 베를리너는 이 그라모폰에서 LP (Long Playing Record)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SP (Standard-Playing Record)의 초기 형태를 채용했다. 베를리너가 채용한 기록 매체는 LP나 CD같은 동그란 원반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음반은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인 포노그래프가 채용한 실린더 레코드와는 달리 마모에 강하고, 대량생산에 강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번의 시행 착오 끝에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은 1895년경에 이르러서는 축음기의 원조인 에디슨의 포노그래프를 누르고 축음기 계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와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의 발명으로 인해 그동안 악보로만 존재했고, 라이브로만 들을 수 있었던 음악을 언제 어디서든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산업적으로 볼 때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은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에디슨보다 큰 업적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바로 음원의 대량 복제와 유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라모폰이 대중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축음기를 집에 들여다 놓으면서 음악이 공개된 공간에서 점점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영화 산업에서 VHS같은 비디오 플레이어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아티스트들 입장에서도 한번 녹음하면 거의 무한대로 복제본 생성이 가능해졌기에 더 많고 다양한 음악들을 녹음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음악 산업이 양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출판 산업의 일부로서 시작된 음악 산업이 축음기를 통해 독자적인 산업 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현재와 같은 음원 공급과 유통 시스템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악보 출판사들의 위치는 음반 회사들로 대체되면서 음악 산업은 영화 산업보다 먼저 산업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음악 산업은 축음기의 등장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또 한번의 대격변을 겪게 된다. 바로 라디오의 등장이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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