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엔터테인먼트산업 주류가 되다"
입장료수익 증가...영화제작기술 발전 이뤄내
[오피니언뉴스=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어떤 산업이든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유통 구조는 매우 중요한 한 축이다. 기술이 콘텐츠 산업의 핵심적인 기반이 되기 시작한 현대 콘텐츠 산업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문화 양식과 만나 하나의 콘텐츠 장르가 되고 규모가 확대돼가는 과정에서 유통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주류, 비주류의 갈림길이 정해졌다.
1900년대 초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영화 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기의 영화 산업은 비주류에 머물러있었다. 당시의 주류 엔터테인먼트는 라이브 공연, 연극과 같은 무대 예술이었다. 영화는 그들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유는 영화가 아직 그들만의 유통구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주류에 머물러있던 영화 산업이 일약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선 건 1905년 미국 피츠버그에 ‘니켈로디언’이라 불리는 영화 전용 상영관, 즉 영화관이 생긴 이후의 일이다.
니켈로디언의 탄생
1905년 에디슨 컴퍼니에서 영화 ‘대열차 강도’를 선보이고 이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불러일으키자 영화가 더 이상 막간이나 시간 때우기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 사업가들은 새로운 ‘영화만을 상영하는 극장’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1905년 6월 19일, 약 450명의 사람들이 미국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에 위치한 세계 최초의 영화관 개막식에 참석했다. 쇼맨이었던 해리 데이비스는 총 96석 규모의 영화 전용 상영 극장을 만들었고 입장료로 5센트를 받았다.
니켈로디언이라는 당시 영화관을 부르는 명칭 자체가 이 입장료에서 유래하는데, 5센트짜리 동전을 니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5센트를 의미하는 니켈이라는 단어에 그리스어로 극장을 뜻하는 오데온을 합쳐 ‘니켈로디언’이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이 날 이후 니켈로디언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니켈로디언은 단편 영화 여러편이 포함된 라인업을 구성하였고, 여기에는 당시 대유행하던 영화 <대열차 강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7년까지 약 2백만명이 넘는 미국인이 니켈로디언에서 영화를 즐겼다. 초기 니켈로디언 업주의 대부분은 기존의 보더빌 극장주들이 많았다. 그들은 공연 배우들의 파업을 계기로, 대중들이 화려하지만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보더빌 쇼에 비해 제작비도 아주 저렴하면서 파업으로 인한 흥행 비즈니스의 중지도 없는 ‘영화’라는 새로운 콘텐츠에 눈을 뜨게 된 참이었다.
니켈로디언은 주로 대도시의 중심에 있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소극장’정도의 수준으로 객석은 100석 이하가 보통이었다.
주 6일 개관에 15분마다 관객을 교체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어 하루 평균 7000명에서 8000명의 관객을 유치했다. 단순히 계산해도 하루 400달러 정도의 수익이 생겼다. 당시 흥행작이었던 ‘대열차 강도’의 제작비가 150달러였으니, 그 수익성에 많은 사업가들이 너도 나도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2000년대 초반 IT 붐과 게임 붐을 타고 한국에서 PC방이 동네마다 생겼던 일을 떠올리면 아마 그 때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1907년 시카고에서만 158개의 니켈로디언이 영업을 했고, 1908년에는 그 숫자가 두배가 되었다. 1908년에는 미국 전역을 통틀어 약 8000개가 넘는 니켈로디언이 생겨났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니켈로디언이 크게 유행한데는 당시 미국에 물밀 듯이 쏟아져들어오던 유럽계 이민자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토키라 불리우는 유성 영화가 나오기전까지 초기 영화는 소리없이 영상만 전달되던 무성영화였다. 이런 무성영화는 오히려 영어를 모르던 유럽계 이민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오락거리였고, 5센트라는 싼 입장료 역시 가난했던 이민자들에게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켈로디언의 대부분은 대도시의 중심에서 이민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성행했다. 니켈로디언이 이민자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면서 많은 이민자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적은 비용으로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사업 아이템’이었던 니켈로디언은 특히 미국에 막 도착해 정착 중이었던 이민자들에게 인기있는 사업 아이템이 되었고, 이민자 밀집지역의 니켈로디언은 이민자들에게는 가성비 좋은 오락거리와 함께 사교의 장을 제공하는 이민자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어갔다.
니켈로디언은 장편영화가 일반화되는 1910년대를 기점으로 점점 쇠퇴해간다. 장편영화는 5센트라는 싼 티켓값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행은 짧았지만 니켈로디언은 미국의 영화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만드는 큰 계기를 마련했다.
니켈로디언이 번성하면서 미국에 많은 ‘영화 재벌’들이 탄생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민자들이며 니켈로디언으로 축적한 자산을 바탕으로 차세대 영화계를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그들은 이후 미국의 헐리우드와 대형 영화 배급사들의 모태가 되었다.
니켈로디언 등장이전...극장은 카페였다
니켈로디언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영화는 주로 무대 공연을 위한 공연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카페 등에서 이루어졌다. 뤼미에르 형제가 첫 영화를 상영한 곳도 파리의 ‘그랑 카페’로 알려진 ‘르 그랑 카페 카퓌신 (Le Grand Cafe Capucines)’이었다. 당시 이런 카페의 공간은 정치 집회나 사교 모임들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이벤트 공간이었다.
조르주 멜리에스도 제작한 영화들을 자신이 직접 운영하고 있던 마술쇼 극장인 ‘로베르-우댕 극장 (Théâtre Robert-Houdin)’에서 상영했다. 순회 공연이나 노천 상영같은 방식도 많이 이뤄졌다.
상영 장비나 필름을 가지고 순회하며 지역 축제가 열리는 곳에서 천막을 치고 상영을 하는 형태였다. 1902년 미국 L.A의 일렉트릭 시어터(The Electric Theatre)는 라이브 공연과 함께 영화를 제공했다. 천막으로 된 이 공연장은 상설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됐으며, 1시간 공연에 10센트의 입장료를 받았다.
앞서 조르주 멜리에스의 이야기에서도 설명했듯, 초기의 영화는 메인 무대 (조르주 멜리에스의 경우에는 마술쇼) 중간의 막간을 채우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 초기 영화들이 우선 상영시간이 짧았고, 내용도 일상이나 풍물같은 일반적인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기함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지만, 어느정도 한계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만을 상영하는 ‘영화관’이라는 사업 아이디어는 영 재미없는 비즈니스로 보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도 영화 산업은 착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얼핏 유럽과 미국의 영화 산업은 비슷해보였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토머스 에디슨이라는 존재였다. 유럽의 영화 산업의 주력은 흥행가들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무대 예술의 한계를 보완하고, 극 무대의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영화를 사용하는 측면이었다. 미국은 달랐다. 에디슨이라는 성공한 사업가에 의해 진행된 미국 영화 산업은 초반부터 자금력이 있는 대기업이 영화 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에서 다양한 영사장치가 막 개발되기 시작하던 당시 에디슨 역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원시적인 영화 상영 장치를 발명했다.
키네토스코프란 상영장치가 들어간 작은 통이 있고, 장치 위쪽에 있는 뷰파인더로 영화를 들여다보는 형태의 1인 상영장치이다. 이는 영사형태의 방식이 아닌 장치 안에 있는 필름을 빠르게 돌려 정지 사진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에디슨은 이 장치를 전용 가게에 여러 대 설치하고 볼 때 마다 돈을 받는 방식으로 영업했다. 시네마토그라프같은 영사장치들이 나오면서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키네토스코프에 대한 비즈니스 경험은 에디슨에게 영화 산업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유럽의 멜리에스를 비롯한 많은 초기 영화 제작자들이 자신만의 기법을 만들며 점차 초기 영화를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에디슨 역시 초기 형태의 영화 스튜디오들을 설립하고 영화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작된 에디슨의 영화들은 1900년대 초 유행한 일명 ‘보더빌 쇼’의 한 부분으로 활용되었다.
보더빌 쇼란 18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노래와 춤, 마술쇼, 덤블링 같은 기예 등을 보여주는 라이브 쇼 엔터테인먼트의 하나로 1900년대에 들어서는 전용 극장에 거대하고 화려한 무대, 수 많은 무희와 예능인들이 등장하는 대형 쇼였다. 에디슨의 영화들은 멜리에스의 마술쇼같이 주로 막간이나 쇼의 마지막에 상영됐다.
영화들은 춤추는 무희나 광대들의 기예 등 보더빌 쇼를 영상화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 영화들은 커튼콜까지 끝난 무대에 주로 그전에 있던 관객들을 내보내고 새로운 관객들로 객석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쓰이곤 했다. 그래서 당시 에디슨의 영화들을 ‘체이서’(쫒아내는 자)라 부르기도 했다.
초기 보더빌의 극장주들은 영화를 대여하는 방식이 아닌 우편 주문을 통해 에디슨과 같은 영화 스튜디오들로부터 영화를 하나하나 구매해야만 했다. 이는 많은 비용이 들었으며, 새로운 영화가 나올 때마다 구매를 해야하기 때문에 영화를 자주 바꿀 수가 없었다. 같은 영화가 오래 상영되다보니, 관객들은 곧 싫증을 냈다. 극장주들은 영화들이 빨리 빨리 회전될 수 있는 보다 다른 방식의 시스템을 원했고, 1902년 샌프란시스코의 헨리 마일즈가 영화를 극장들에게 대여하기 시작하면서 현대적인 ‘배급’시스템이 시작되었다.
보더빌 극장주는 새로운 대여 시스템을 통해 영화를 빠르고 다양하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고, 영화는 곧 막간의 여흥이기는 하지만 보더빌 쇼의 정식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던 중 1901년에 있었던 보더빌 공연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영화 산업은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화이트 랫’(흰쥐)라 불리던 보더빌 공연자들은 평소 열악한 임금 체계 및 근로 환경에 맞서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1901년 뉴욕시를 중심으로 파업에 돌입한다.
파업으로 인해 공연자가 사라진 텅 빈 공연장을 차지한 것은 영화였다. 영화는 보더빌 공연자들의 파업 기간 동안 메인 공연물로 자리잡았고, 이를 본 극장주를 비롯한 많은 제작자들은 ‘파업도 없고, 제작비도 싼’ 영화라는 콘텐츠가 보더빌 쇼를 대체할 수 있거나 새로운 흥행 비즈니스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더빌 배우들의 파업으로 인해 영화의 ‘시장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영화 산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는 곧 영화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필름의 길이가 늘어나며 러닝타임이 증가했다. 합성 기술, 편집 기술등의 제작 기법들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영화의 상업성에 눈을 뜬 사업가들의 등장, 영화 제작 기술의 발전. 두가지 요소가 만나 본격적인 상업극장 '니켈로디언'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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