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⑧ 장편영화는 왜 '롱 필름' 아닌 '피처 필름'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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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⑧ 장편영화는 왜 '롱 필름' 아닌 '피처 필름'이 됐을까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0.05.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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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미만 단편이 대세이던 시절
장편영화는 특별한(?) 영화였다
세계 첫 장편은 1906년 호주서 제작
'캘리갱 이야기', 런닝타임 60분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오래 전 학교에서 영화 이론 수업을 듣던 중의 일이다. 영화 이론을 듣다가 뜬금없이 궁금함이 들었다. 왜 단편 영화는 쇼트 필름 (short film)이라고 하는데 장편 영화는 피처 필름 (feature film)이라고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피처 필름이 맥주집의 피처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말이다. 바로 사전을 찾아봤으면 맥주집의 피처가 주전자를 의미하는 피처 (Pitcher)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겠지만, 나름 아 피처는 양이 많으니까 양이 많은 (장편의) 필름이어서 피처 필름이구나 하고 어처구니없는 나름의 결론을 냈던 기억이 난다. (이래서 뇌피셜이 무서운겁니다)

10분 정도가 한계였던 초기 영화

장편영화가 롱 필름 (long film)이 아니라 특색이나 특징이라는 의미의 'feature'를 붙여 ‘피처필름’이라 불리는 건 나름의 역사적인 유래가 있다.

장편영화가 처음 등장한 1900년대 초반 막 산업으로의 급 성장기를 겪고 있던 영화 산업의 가장 큰 고민은 ‘영화가 너무 짧다’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길어봐야 10분을 넘지 않았고, 당시 대 흥행 중이던 ‘대열차 강도’도 당시 영화들에 비하면 아주 긴 영화였지만 전체 러닝타임이 12분 정도였다. 

1910년에 제작된 캘리 갱 이야기의 포스터. 사진출처=위키피디아.
1910년에 제작된 캘리 갱 이야기의 포스터.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당시 영화가 짧았던 건 기술적인 문제였다. 우선 초창기 영화의 필름을 만든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조지 이스트만 (코닥 필름의 창업자)이 1889년에 생산하기 시작한 필름롤은 65피트 롤이었다. 70mm 표준의 65피트 롤은 초당 12프레임 정도로 돌린다고 하면 약 1분 20초에서 1분 30초 정도 상영할 수 있었다. 

초기 영화의 대부분의 러닝타임이 이 정도 시간이었던 것이 바로 필름의 길이 때문이었다. 기술적으로 더 긴 롤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고 그 정도의 러닝 타임으로도 만족했던 당시 영화 제작자들에게 굳이 비싼 비용을 들여서까지 긴 러닝타임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영화에 스토리텔링이 도입되고 복수의 시퀀스를 포함한 서사구조가 포함되기 시작하자, 영화 제작자들은 보다 긴 필름 롤을 원하기 시작했다. 1892년에 에디슨 컴퍼니의 직원인 윌리엄 딕슨이 당시 70mm 필름을 반으로 나눠 35mm 필름 표준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초기 영화의 러닝타임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딕슨의 35mm 필름은 무성 영화의 표준 필름이 되었고,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포맷이다.

35mm 표준을 채택한 새로운 필름 롤을 에디슨(오른쪽)에게 선보이고 있는 조지 이스트만. 사진출처=위키피디아.
35mm 표준을 채택한 새로운 필름 롤을 에디슨(오른쪽)에게 선보이고 있는 조지 이스트만. 사진출처=위키피디아.

35mm 표준화로 인해 초기 영화는 우선 러닝타임이 두배로 늘어났다. 거기에 1900년대 초반에 들어와 코닥 필름의 조지 이스트만이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긴 롤의 필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창안하면서 서서히 1000피트 롤의 ‘긴’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시 만들어진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도 약 900피트 롤의 러닝타임 18분 정도 되는 영화였다. 점점 필름을 만드는 기술도 발전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맞게 영사기나 카메라 등의 기자재도 성능이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장편영화에 대한 기술적인 기반은 마련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기술의 개발이 상용화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초기 영화시대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장편 영화 등장의 배경

1890년부터 1905년까지 장편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은 확보되었지만, 당시 영화계에서는 장편영화에 대한 수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영화는 눈요깃거리로 잠깐 보는 ‘신기한 풍물’이었고, 라이브 공연 무대 등에서 막간으로 상영되는 ‘시간 때우기’ 콘텐츠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대열차 강도’같은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들이 대흥행을 기록하고, 영화가 라이브 공연들에 비해 제작비는 적게 들면서 한번 찍어놓으면 배우가 아파도,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필름만 돌리면 ‘무한정’ 돈을 뽑아낼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사업 아이템임을 사업가들이 눈치채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영화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제공하는 극장들이 늘기 시작했다. 

19세기가 지나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니켈로디언같은 서민들을 위한 영화관도 생기고 관객들도 많이 늘면서 다양한 영화에 대한 욕구는 점점 높아져갔고, 이에 부응하기 위한 ‘포맷’의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영화 제작자들은 먼저 영화의 길이를 늘이고 더 많고 복잡한 ‘스토리’들을 담기 시작한다. 바로 장편 영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짧다'가 당연하던 시절...긴 영화는 '특색'있는 영화였다 

다시 돌아가 장편 영화가 왜 피처 필름 (feature film)이라 불리는 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피처 (feature)라는 단어가 마케팅이나 홍보 등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피처폰이라 부르는 휴대폰의 종류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피처폰은 스마트폰이 아닌 휴대폰을 부르는 통칭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처폰이 왜 피처폰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이 휴대폰의 주류가 되어가던 2010년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마트폰과 피처폰이라 불리는 일반 휴대폰이 양립하던 시기에 스마트폰이 아닌 일반 휴대폰은 여전히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었고, 수요도 높았다. 각 휴대폰 제작사의 마케팅 부서들에서는 스마트폰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기능이 특화되었거나 나름 특색있는 폰들을 출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특색있는 폰이라는 의미로 ‘피처폰 (feature phone)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전화만 되는 정말 일반적인 폰들은 바닐라 폰 (Vanilla Phone)이라고 부르는데, 아무것도 들어가있지 않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딱 전화나 텍스트만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만 있는 폰을 의미한다. 이렇듯 피처란 말은 과거와는 다른 뭔가 특색있는 신제품을 출시했을 때 즐겨 붙이는 단어로 이는 1900년대 초반의 영화 마케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장편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영화 제작사에서는 과거의 영화와 무언가 다르다는 의미를 새로운 장편 영화들에게 부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긴 필름 (long film)이라고 해도 될 것을 피처 필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 단어가 굳어 그냥 장편 영화를 피처 필름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짧은 영화만 존재하던 시대에는 단편 영화 (Short film)라는 개념은 없었고, 단편 영화의 개념은 장편 영화들이 대세로 자리잡게 되자 이를 구별하기 위해 쇼트 필름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피처 필름이라는 단어가 한때 영화라는 것은 짧은 것이 당연한 시절의 유산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

현재의 관점에서 장편 영화의 기준은 보통 80분에서 180분의 상영 시간을 가지는 영화다. 시대를 따라 비디오나 DVD, 블루레이같은 2차 미디어의 저장 용량에 따라 시대별로 표준적인 장편 영화의 길이는 제각각이긴 하지만, 보통은 이 정도를 장편영화로 본다. 실제로 배우 조합이나 다양한 기관에서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이를 조금씩 줄였다 늘였다 하긴 한다. 

독립영화에서 가장 권위있는 선댄스 영화제에서는 50분만 넘으면 장편 영화로 인정해준다. 아무래도 예산이 적은 독립 영화계에서는 80분도 조금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라 할 수 있는 호주의 ’캘리 갱 이야기 (The story of the Kelley Gang)‘는 상영 시간이 60분이었다.

호주에서 첫 영화가 상영되고 캘리 갱 이야기가 초연된 멜버른 아테니움 홀.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호주에서 첫 영화가 상영되고 캘리 갱 이야기가 초연된 멜버른 아테니움 홀.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많은 사람들은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가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호주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조금 의아해한다. 워낙 헐리우드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호주도 영화 강국에 속한다. 프랑스에서 첫 영화가 상영된지 1년도 안돼 멜버른에서 영화가 상영되었고, 구세군에서 운영한 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인 ‘라임 라이트 디파트먼트’의 본거지도 멜버른이었다. 구세군은 이 스튜디오에서 다수의 종교 영화들을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인 ‘남쪽 하늘 아래 (Under Southern Skies)’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상영 시간이 100분에 달하며, 1906년에 개봉된 ‘캘리 갱의 이야기’보다 5년 이나 일찍 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최초의 장편 영화라고도 하지만,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최초의 영화라는 타이틀은 가지지 못했다. ‘캘리 갱 이야기’는 여러모로 1903년 작품인 ‘대열차 강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우선 범죄 영화라는 점도 그렇지만, 영화의 많은 부분이 당시 대 흥행 중이던 ‘대열차 강도’를 닮아있다. ‘캘리 갱 이야기’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26년 전에 잡혀 처형당했던 실제 범죄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총 4000피트에 달하는 필름 롤에 켈리 갱의 마지막  스토리를 담아냈다. 

호주에서 처음 영화가 상영된 멜버른 아테니움 홀 (Melbourne Athenaeum)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1908년에는 영국에서도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흔히 아웃백 웨스턴 (미국의 정통 웨스턴 무비와 구별하기 위해 만든 용어로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스파게티 웨스턴같은 의미의 용어이다)의 효시로 보며, 현재의 호주 영화 산업은 이 작품에 의해 형성 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초기 영화들이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기록에만 남아있고 전체 영화가 남아있지 않다. 1976년에 필름의 일부분이 발견되고 이후 고물 쓰레기 더미에서 추가 필름들이 발견되면서 2006년 디지털 복원본을 공개했다. 복원된 총 영상의 길이는 17분으로 전체 60분의 내용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라스트 신을 포함한 중요한 장면들이 남아있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영화 '캘리 갱의 이야기' 한장면. 사진출처=호주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캡쳐.
영화 '캘리 갱 이야기' 한장면. 사진출처=호주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캡쳐.

‘캘리 갱 이야기’는 단순히 최초의 장편 영화라는 점에 머물지 않는다. 무성 영화였던 당시 영화에 라이브 사운드를 입힌 것이다. 총소리들을 재현하기 위해 코코넛 껍질이나 빈 통들을 이용해 상영 중에 소리를 내는 등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점은 당시의 관객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호평을 받았고, 60분이라는 당시에는 긴 상영 시간을 극적인 경험의 시간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캘리 갱의 이야기’의 영화 내적, 외적 시도들과 그에 따른 흥행 성적은 장편 영화에 대한 사업적인 가능성을 전 세계 영화 제작자들에게 심어주었고, 이후 장편 영화는 ‘특별한 필름 (feature film)’이 아닌 일반적인 영화로 영화 산업에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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