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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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08.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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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불안, 위안화절하, 美금리인상, 엔화절하 비슷… 9월 위기설

방콕 도심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난 다음날인 18일 태국 바트화 가치는 2009년 이래 6년만에 최대폭으로 하락했다. 정치적 사회적 불안감이 엄습한데다 관광산업이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0%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이므로, 경제에 큰 타격을 준다는 우려가 금융시장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라보뱅크그룹 리서치센터의 마이클 에버리 연구원은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으로 태국에서 1997년 외환위기 악몽이 되살아나는 상황”이라고 강조하면서 “폭탄 테러가 투자심리 회복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서 우려 섞인 분석을 내놨다.

1997년 데자뷰. 그해 여름 태국 바트화 폭락을 계기로 촉발된 아시아 금융위기의 태풍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거쳐 북상, 한국도 마침내 IMF 위기라는 초유의 경제위기를 겪었다. 비슷한 상황이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다.

진앙지의 기상여건은 20년전 태풍이 형성될 상황과 비슷하다. ①정정 불안 ②중국 위안화 절하 ③미국 금리인상 ④일본 엔화 절하등 4가지 측면에서 상황이 비슷하다.

하지만 그때와 상황이 다른 점도 많다. 중국 경제의 규모가 20년전에 비해 엄청나게 켜졌고, 미국경제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중국 위안화 절하가 과거처럼 하루 아침에 50% 절하하지 않고 스무스 오퍼레이팅(smootiing operating)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금리 인하도 과거처럼 가파르게 진행되지 않고 세계 경제의 영향을 보아가며 단계적으로 인상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년전에는 한국을 비롯,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사실상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면, 과거의 악몽이 떠오르는 법. 그래서 9월 위기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① 정정불안

<현재>

태국의 정국을 고려할 때 정치적 목적의 테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해 5월 육군 사령관이던 프라윳 찬-오차 현 총리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국가 안정과 국민 화해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켜 잉락 친나왓 전 총리 정부를 무너뜨린후 정치적 긴장이 고조됐다. 잉락 전 총리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여동생이다. 그가 정치적 반대 세력을 체포, 구금하며 군부 정권의 연장을 꾀하자 정적들의 반발이 커졌다.

태국 군부는 올해 10월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를 내년 초, 내년 9월로 연기한 데 이어 2017년 4월로 또 늦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 17일 저녁 폭탄 테러가 일어난 방콕 시내 에라완 사원. /연합뉴스

말레이시아에서도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나집 라작 총리의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이 여권의 막후 실세인 전직 총리와 현직 총리 간의 선거자금 공방으로 번지고, 여기에 야권이 가세해 말레이시아 정국이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22년간 집권하고 2003년에 퇴임한 마하티르 전 총리는 "중동에서 기부받았다는 나집 총리의 해명은 거짓말"이라며 나집 총리의 사퇴를 주장했다. 이에 인민정의당(PKR) 등 야당 지도자들은 2013년 총선 당시 나집 총리의 선거법 위반과 선거 결과 무효를 주장하며 지난 12일 법원에 소송을 냈다

나집 총리는 이에 맞서 “마하티르 총리도 의석 수를 고려한 선거 예치금만 해도 최소 4ㅡ100만 링깃(118억 원)이 필요했을 것"이라며 반격을 가하고 있는 상황.

정정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말레이시아 통화인 링깃화는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17년만에 최저치로 폭락하고 중앙은행이 통화하락을 막느라 외환보유액이 급감하고 있는 실정이다.

 

<20년전>

1996년 12월 입각한 암누아이 와라완 태국 재무장관은 개혁성향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정부 예산 축소, 은행 대출 규제 강화, 부실 은행의 인수 및 합병, 20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 등을 과감히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연립정권 내부에서부터 비판을 받았고, 야당은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소비세 도입이었다. 소비세는 야당이 의회를 마비시키면서까지 강력히 반대했고, 집권 여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제기됐다. 소비세 부과 법안이 부결되자, 그는 물러났다.

이어 새로 재무장관에 오른 사람은 타농 비다야라는 49세의 젊은 경제학자였다. 그는 중병에 신음하는 태국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서는 부실 은행을 파산시켜, 썩은 살을 도려내는 극약 처방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태국은 정치적 전환기였고, 불안한 정정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는 실무경험과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과감한 개혁을 드라이브하지 못했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기업의 부채 만기를 연장하고, 금융기관의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파국을 며칠 연장할 뿐, 경제의 깊은 병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② 중국 위안화 절하

<현재>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11일 전격적으로 위안화 기치를 1.86% 평가절하한데 이어 사흘간 4.6% 절하했다.

이번에도 중국의 위안화 절하로 중국의 주요 경쟁국인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신흥국들이 경쟁적으로 통화를 절하했다. 가장 큰 폭의 통화 절하가 진행된 국가는 말레이시아다.

경제전문가들은 이번 절하로 중국의 수출이 살아니기 힘들 것으로 보이며, 수출 주도의 중국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한 위안하를 연속적으로 절하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목표를 7%로 설정했다. 1분기와 2분기의 성장률은 각각 7%로 집계됐지만 하반기 들어 주가 폭락과 지표 부진 등으로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 아시아 국가 가운데 한국과 말레이시아, 대만, 태국 등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보도한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 포인트 하락할 경우 다른 아시아 국가의 성장률은 0.3% 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20년전>

1994년 1월 1일, 중국은 위안화 가치를 무려 50%나 절하했다. 하룻사이에 반토막을 낸 것이다. 지금은 중국 금융시장이 상당히 개방돼 있어 그렇게 할수 없지만, 당시엔 통제경제였으므로 가능했다.

그후 나타난 것이 신흥국 시장의 금융위기다. 중국과 신흥국 시장이 경쟁하고 있었으므로 신흥국의 수출경쟁력이 약화하고 무역적자가 증가하면서 외환 고갈현상이 가중된 것이다. 1995년에는 멕시코를 시작으로 남미가 무너졌고, 1997년 태국을 발원지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③ 미국 금리인상

<현재>

올 5월 말 재닛 옐렌 Fed 의장이 연내에 기준금리를 올릴 것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면서 주식시장의 거품을 경고했다. 그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뉴욕 증시는 꺾이지 않았다. 달러 강세는 지속됐다.

뉴욕 월가의 페드워쳐(Fed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애널리스트)들 사이에는 미국 기준금리 인상이 올해 9월에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블룸버그통신이 이달 7∼12일 금융시장 전문가들에게 9월 금리 인상 가능성에 대해 물은 설문조사에서 '인상될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77%였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은 세계 금융시장, 특히 아시아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높일 게 분명하다. Fed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유동성이 급격히 줄면 신흥국 시장에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외화 보유액이 적고 총외채 대비 단기외채 비중이 높은 국가들은 특히 미국 금리 인상 과정에서의 취약국가로 분류된다. 아시아 국가들이 타깃권을 형성하고 있다.

 

<20년전>

1994년 2월에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준(Fed) 의장은 기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그린스펀 의장은 주식시장의 과열을 경고하면서 그후 금리를 지속적으로 올려 단기간에 6%까지 인상했다. Fed의 가파른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뉴욕 증시의 버블을 꺼지지 않고 달러 강세를 지속시켰다.

달러 강세는 주변국의 돈을 빨아들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아시아 신흥국에 흘러들어갔던 자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아시아 자본시장에 빈혈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고정통화제를 유지하던 국가부터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이 됐다. 첫 번째가 태국, 다음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였고, 해외부채가 막대한 한국도 만기가 돌아오는 해외채무를 막을 여유자금(외환보유액)이 바닥났다.

 

 

④ 일본 엔화 절하

<현재>

2012년 12월 일본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집권하면서 잃어버린 일본경제를 살리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통화확장 정책을 실시했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내리누르면서 엔화를 찍어내면서 퍼부어 경기를 살리겠다는 취지다.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2∼3%의 인플레이션 목표를 세우고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는 엔화 약세다. 일본 수출을 살린다는 명분도 작용했다. 수출 경기를 진직시키고 주가를 끌어올리는데 일단 성공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달러에 대한 엔화 절하폭은 20% 안팎이며, 한국 원화에 대해서는 30%를 넘어선다.

엔화 약세에 가장 치명적인 나라는 한국이다. 자동차, 가전, 기계, 중화학 제품에서 일본과 바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대일 무역 비중이 높은 아시아국가들도 엔화 약세로 수출경쟁력을 잃고 있다.

 

<20년전>

1990년대 중반 빌 클린턴 행정부에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등장하면서 ‘강한 달러’ 정책을 취했다. 미국 금리가 급상승한 반면에 일본의 재할인율은 인하되고 있었다. 금리갭에서 엔화 약세가 진행됐다.

96년초 엔화환율은 1달러당 100엔을 다시 넘었고, 97년 1월말 120엔을 넘어섰다. 95년 최저치에 비해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40%, 마르크화는 20% 절하된 채 97년 상반기를 맞았다. 엔화는 그후에도 바닥을 모른채 하락해 아시아 위기 전인 97년 4월 30일 1달러당 127.10엔까지 떨어졌다. 2년전 최저치에 비해 무려 57%나 하락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엔화 절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한국은 완만한 속도로 원화를 절하함으로써 대응했지만, 엔화 절하속도가 너무 빨라 무역 수지 적자가 누적됐다. 태국, 인도네시아, 홍콩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켜 엔저에 대처하지 못했다.

예일대의 제프리 가튼 교수는 저서 「10대 신흥공업국(The Big Ten)」(1998년 개정판)에서 엔화 약세가 아시아 환란의 원인이었음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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