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③] 동해안에서 울릉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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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③] 동해안에서 울릉도가 보인다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08.0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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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사부항로탐사, 우리 국토와 역사의 소중함을 배운 탐사여행

이사부항로탐사반을 실은 코리아나호는 29일 오후 5시 30분 울릉도 사동항에 도착했다. 독도에서 7시간 반이나 걸렸다. 일행은 이틀 사이에 무려 27~28시간 배 위에 생활하느라 지쳐 있었다. 정채호 선장은 “원양선을 타면 한달 이상 선상 생활을 하고, 그때 가장 무서운 것이 태풍이나 기상악화가 아니라 외로움”이라고 했다. 선상에서 생활을 하는 선원들이 엄청 고생하는 직종임을 실감했다.

일행은 일단 하선해 도동항으로 장소를 옮겨 휴식을 취한후 코리아나로 돌아와 취침했다. MBC 취재팀은 자체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하선하고, 남은 일행들은 30일 하루동안 울릉도 역사탐방 및 관광을 하기로 했다.

 

이사부도 우산국의 위치를 확인하고 항로를 정했다

울릉도는 예로부터 뭍에서도 육안으로 관측됐다고 한다. 이사부(異斯夫) 장군도 20대에 실직군주(悉直軍主)로 삼척에 부임하면서 촌로들로부터 울릉도를 보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기록으로는 고려 문신 이승휴(李承休)가 쓴 <동안거사문집(動安居士文集)>에 그 사실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승휴는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으로 내려가다 몽골의 침략으로 길이 막혔다. 그때 그는 요전산성(寥田山城)에서 진주부(당시 삼척 지명) 군민들과 함께 몽골과 싸웠다. 그는 몽골과의 전투 장면을 이렇게 적었다.

“계축년 가을에 몽골의 난리를 피하면서 진주(삼척)부 요전산성에 모여 수비했다. 성의 동남쪽은 바닷가 하늘에 닿아 사방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속에 산아 하나 있는데, 구름 물결 안개 파도의 속에 떴다 가라 앚았다, 나타났다 잠겼다 했다. 아침저녁에 더욱 아름다웠는데, 마치 무슨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이 ‘무릉도(武陵島)입니다’라 했다.”

이승휴는 현지 노인들의 말을 듣고 삼척 바닷가 높은 곳에서 무릉도가 보인다고 기록했다. 무릉도는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다.

▲ 삼척 임원의 소공대에서 촬영한 울릉도. 이 사진은 소니 a900에 700-300렌즈(1.5크롭)로 촬영했다. 촬영 방법은 우선 일기가 좋아야하므로 태풍직후나 큰비가 온 다음 하늘이 쾌청할 때가 좋다. 옛 문헌에는 가을철 청명할때 주로 봤다고 한다. 소공대를 오르는 길은 삼척 임원에서 호산으로 가는 구 도로에 소공대로 가는 안내 표지판이 있는데, 그곳에서 약 5.5킬로 정도되며 해발 약 300미터정도입니다. /사진 이효웅. 촬영일자 2010년 9월 27일

이번 항해 중에 다행히 삼척에서 울릉도를 관측하고 촬영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효웅씨다. 내게는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그는 동해시 청운초등학교 교사를 마치고 사진작가를 겸하고 있는데, 2010년 9월 27일 동해 망망대해에 떠있는 울릉도를 삼척 해안에서 카메라 렌즈로 잡았다.

이효웅씨는 그해 8월말부터 한달동안 삼척시 원덕읍 소공대(召公臺)에 올라 울릉도 촬영을 시도하다 9월 2일과 24일, 27일에 여러 컷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중 27일 찍은 사진은 성인봉을 중심으로 우뚝 솟은 울릉도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잡혔다고 한다.

이씨는 “과거에 소공대에서 울릉도를 바라본 시가 여러편 소개된 바 있어 망원렌즈로 촬영이 가능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소공대는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 소공령 정상(해발 320m)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옛날부터 많은 문사들이 울릉도를 바라보며 시를 읊은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 선조때는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울진으로 귀양가면서 남긴 망양정가(望洋亭記)에서 “소공대를 지나면서 아득히 보이는 울릉도를 바라보니 마음이 저절로 기브고 행복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하다. 소공대가 위치한 임원항에서 울릉도 까지 거리는 137km로, 울진 죽변항에서의 거리 130.3km와 함께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로 꼽히고 있다.

이사부 장군이 군주로 부임한 실직은 옛 실직국의 땅이다. 실직국의 강역은 북쪽으로는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에서 경북 동해안인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해상왕국이었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흐르고, 그 사이 바닷쪽으로 뻗친 지맥 사이로 소하천이 형성되어 있다. 실직국은 강원도 남부에서 경북 북부에 이르는 동해안에 좁고 길게 연맹체를 형성했다. 안데스 산맥에 가로막혀 길쭉하게 국토를 형성하고 잇는 남미의 칠레를 연상케 한다.

동해안 유적을 살펴보면 실직국은 북의 옥저, 남의 진한, 변한을 연결하며 중계무역으로 번성한 사실을 알수 있다. 강릉 교황리 유적에서 철 생산과 관련 있는 유구가 출토되고, 동해 망상동과 송정동 유적에서 송풍 파편이 발견됐다. 이는 실직국이 금관국의 철기를 수입해 자체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북쪽의 예국에 수출한 것을 입증한다. 강릉 유적지에서는 중국 한(漢)대의 오수전이 발견되는데, 동해안 해로가 오래전부터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예로부터 맑은 날에 삼척, 울진 등지에서 울릉도를 보았고, 울릉도에서 육지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었으므로, 실직국과 우산국 사이에도 교역이 있었고, 실직인들은 삼척에서 울릉도까지 해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대 해상왕국이었던 실직국 사람들은 해류와 해풍의 방행과 이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박제조술은 물론 항해술도 발달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부임한 후 현지 주민들로부터 울릉도를 보았다는 얘기를 들었고, 7년동안 재임하면서 육안으로 울릉도를 관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사부는 우산국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항로를 결정했으며, 삼척 오분항에서 정동의 방향을 설정해 항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는 실직국의 항해 기술과 인력을 동원해 수군을 조직했으며, 신라로서는 첫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지세가 험난한 울릉도, 이사부 이후 우리 영토였다

30일 이사부항로탐사대는 울릉도 관광에 나섰다. 울릉도는 신생대에 화산이 폭발해 뜨거운 용암이 굳어 형성된 섬이다. 화산 중심부가 굳어 형성된 곳이 나리 분지(나리 칼데아), 거북 바위, 사자 바위, 국수 바위, 버섯 바위, 코끼리 바위, 삼선암등... 해안의 기암괴석은 화산암이 굳어 형성된 바위다.

▲ 3단 형식의 울릉도 봉래폭포.

특히 봉래폭포는 나리 분지에서 형성된 지하수가 3단계의 지층을 깎으며 흘러 내리면서 형성됐다. 장관이었다. 봉래폭포를 가는 도중에 풍혈은 천연에어컨으로 등산길의 땀을 식혀주었다.

<삼국사기>에도 우산국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이사부가 수군을 이끌고 침공하더라도 변화무쌍한 바다를 해자로 삼고, 기암 절벽을 성으로 해서 저항하려고 했지만, 나무를 깎은 사자로 인해 항복하고 말았다고 한다. 울릉도에 와서 직접 보니, 산과 바다의 험준함이 뭍의 신라왕국에 저항할 조건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사부 장군이 싣고온 목우사자(木偶師子)를 동원해 우산국 사람들이 공포에 떨어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시대에 울릉도에는 여진족이 휩쓸고 지나갔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따르면 11세기 초 여진족의 침략으로 울릉도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거주민들은 육지로 건너와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의 일이다.

▲ 산으로 둘러싸인 나리분지. 화산 폭발후 분화구가 분지를 형성했다.

함경도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울릉도에 들이닥친 이후, 동해를 가로질러 울릉도를 들이치고 오늘의 큐슈 북부 이키섬 등을 노략질하고선 동해를 통하여 유유히 돌아갔다. 여진족의 침공으로 울릉도는 쑥대밭이 됐고, 그때부터 거의 사람이 살지 않게 됐다. 따라서 지금 울릉도에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당시에 살던 원주민은 거의 없다.

고려 말엔 왜구의 침입으로 무인도가 됐다가 조선 초 이후부터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울릉도는 조선시대 태종 이후 공도정책을 실시해 주민들이 살지 않았고, 이틈을 타서 일본은 울릉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는 512년 이사부의 정복 이후 항상 우리영토였고,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 국토의 소중함과 역사를 배우는 탐사여행이었다

울릉도 여행을 마치고 일행은 다시 코리아나를 탔다. 31일 오전 4시 50분 코리아나는 울릉도 사동항을 출발해 서쪽을 행했다. 오후 2시 한반도의 등뼈를 형성하는 백두대간이 보이고, 오후 4시 30분 일행은 삼척항에 도착했다.

4일간 선상에서만 40시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지루하고 힘든 여정이었다. 하지만 서기 512년 이사부 장군의 동해 공략이 있었기에 넓고 넓은 동해바다와 그 안에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가 되었다는 역사를 배우는 보람찬 탐사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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