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60) 돈의문 일대 근대건축물과 성곽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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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60) 돈의문 일대 근대건축물과 성곽 마을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18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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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돈의문 일대는 지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한양과 중국을 연결하는 의주로의 출발점인데다 경기감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99년부터는 노면전차 노선이 연결되며 돈의문 일대는 더욱 번창해졌습니다. 

그런데 1915년 전차 궤도 복선화 때문에 돈의문이 헐릴 때 인근의 성벽도 함께 헐렸습니다. 그리고 헐린 성벽 주변으로 다양한 계층이 몰려와 살면서 다양한 건축물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꽃 피는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곳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벚꽃도 필 텐데 서울의 다른 곳에서 아무리 벚꽃이 피어도 이곳에 피지 않았다면 공식적으로 서울은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겁니다. 서울의 벚꽃 개화 시기를 알려주는 곳은 종로구 송월동에 있는 국립기상박물관입니다.

국립기상박물관은 예전에 서울기상관측소였습니다. 돈의문이 있었던 정동사거리에서 송월길을 따라가다 서울교육청을 지나면 입구가 나오고, 입구에서 약 200m의 언덕을 오르면 하얀색 근대건축물이 나옵니다. 이 건물은 예전에 기상관측소와 기상청 청사였는데 1932년에 건축된 등록문화재입니다.

종로구 송월동의 국립기상박물관. 예전에 기상관측소와 기상청 청사였던 이 건물은 1932년에 건축된 등록문화재다. 사진=강대호

이곳 마당에는 서울의 계절을 관측하는 기준으로 삼는 식물인 ‘계절관측목’ 10종이 있습니다. 이중 벚나무와 단풍나무는 서울기상관측소 건물과 함께 문화재로 등록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벚꽃이 피는 시기는 이곳에 있는 벚나무 임의의 한 가지에 세 송이 이상의 꽃이 활짝 피었을 때를 기준으로 합니다.

송월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양도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려져 있고 이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변 지형지물을 잘 살펴보면 정동사거리에서 송월길을 따라 이어졌던 성곽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박물관 아래는 공원이지만 과거 항공사진을 보면 주택가였습니다. 

현재 송월길과 접한 교남동은 돈의문뉴타운으로 재개발된 구역으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습니다. 그곳도 주택가였습니다.

송월길 옆 한양도성. 헐린 성곽을 일부 복원해 공원을 조성했다. 사진=강대호

성곽 주변에 들어선 마을

헐린 돈의문과 그 주변에는 다양한 계층이 사는 주거 공간이 있었습니다. 부유층이 살던 벽돌집과 서민들이 살던 개량한옥은 물론 이른바 불량주택도 많았습니다. 아파트가 들어선 교남동 일대의 다양한 주거 공간들은 사진 등의 기록으로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재개발 구역에 속하지 않았던 곳의 옛 주거 공간들은 거의 신축 빌라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빌라들이 줄지어 선 골목을 잘 살펴보면 예전에 그곳으로 성곽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곽을 쌓았던 걸로 보이는 돌로 축대를 쌓은 집들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양도성 바깥인 종로구 교남동 지역은 아파트나 빌라 등 비교적 최근에 지은 주거 공간이 들어섰지만, 성곽 안쪽인 종로구 신문로2가의 골목에는 지은 지 오래된 주택들이 많습니다. 재개발을 염두에 둔 건지 빈집이 많은데 대개 보수를 하지 않아 무척 낡아 보입니다. 이 골목들의 모습은 서울 도심과 가까운 고지대에 들어섰던 서민 동네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종로구 행촌동 성곽 마을. 성곽 너머는 종로구 사직동이다. 사진=강대호

헐린 성곽의 윤곽을 좇아가다 보면 복원된 성벽이 나타납니다. 이곳의 한양도성은 종로구 행촌동과 사직동을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행촌동 쪽에는 마을이 들어섰고 사직동 쪽에는 사직공원이 있는데 공원의 산책로는 인왕산과 연결됩니다. 

행촌동 성곽 마을처럼 서울에는 한양도성 주변에 들어선 성곽 마을이 여럿 있습니다. 흥인지문 인근의 종로구 창신동과 이화동, 그리고 신라호텔 뒤편의 중구 다산동에 가면 한양도성 인근에 들어선 마을을 볼 수 있습니다.

경교장. 강북삼성병원 입구에 있다. 사진=강대호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

돈의문 인근에는 눈에 띄는 근대건축물 두 군데가 있습니다.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이 그곳입니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최후까지 머물던 곳입니다. 원래 이름이 죽첨장(竹添莊)이었던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광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최창학이 1938년에 세운 건물이었습니다. 친일파인 최창학은 해방 후 죽첨정을 헌납했고,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숙소와 집무실로 이용하며 경교장(京橋莊)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후에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이용되다 전쟁 후에는 월남대사관이 되었습니다. 1967년부터는 고려병원,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부속시설로 이용되며 변형되었습니다. 

경교장에 전시된 김구 선생이 암살당할 때 입었던 옷. 사진=강대호

경교장은 2001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5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예전 모습으로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현재 경교장 내부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장입니다. 선생이 저격당할 당시 입은 옷도 볼 수 있는데 검붉은 혈흔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교장을 나와 송월길을 따라 500m 정도 가면 홍난파 가옥이 나옵니다.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로 홍난파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건물 앞에는 홍난파의 흉상도 있습니다.

1930년에 지은 이 근대건축물은 원래 독일인 선교사의 집이었습니다. 근처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고 독일인도 많이 살아서 유럽풍 건물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 건물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송월길 인근의 홍난파 가옥. 사진=강대호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는 이 집에서 그의 말년 6년을 지냈다고 합니다. ‘봉선화’로 일제에 짓밟힌 아픔을 노래한 홍난파는 민족 작곡가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흥사단 활동으로 고초를 겪은 후 전향서를 쓰고는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이러한 말년의 행적 때문에 홍난파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돈의문 인근을 지날 때면 생각거리가 많아집니다. 백범 선생과 홍난파가 살았던 두 근대건축물을 보면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고, 성곽 흔적을 찾다 보면 근대 이후 우리나라 주거 공간의 변화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돈의문 일대에 아파트와 빌라가 많이 들어섰지만, 골목을 잘 살펴보면 지은 지 오래된 개량한옥과 양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해보곤 합니다. 하지만 이 동네도 언젠가는 흔적 없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재개발 이슈가 많은 동네라 그나마 남은 건물들이 싹 헐릴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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