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58) 종각역 젊음의 거리와 종로서적
상태바
[도시탐험, 서울 이야기](58) 종각역 젊음의 거리와 종로서적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04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종각역 일대는 서울의 중심이었습니다. 사대문 안에 서울의 주요 기능이 몰려 있을 때 그랬습니다. 강남과 여의도로 서울 기능이 분산되었을 때도 한동안 종각역은 서울 도심에서도 중심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시절 외국어를 공부하려거나 동네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을 사려면 종각 근처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때 젊은 세대들은 시내에서 약속이 있으면 종각 앞이나 근처의 대형서점 앞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다른 듯합니다.

빈 점포가 눈에 띄는 ‘젊음의 거리’

종각역에서 종로2가 사거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젊음의 거리’가 나옵니다. 도로명으로는 ‘종로12길’입니다. 과거 이 일대에는 노점이 많았습니다. 종로 대로변과 그 뒤쪽 먹자골목을 찾아오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노점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섰던 거죠.

하지만 노점으로 인한 인근 상인들의 민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시와 종로구는 단속하거나 때때로 환경 미화를 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2009년 봄 즈음 서울시는 종로 일대의 노점상 일부를 양성화해 ‘종로12길’에서 영업하게 하는 등 이른바 ‘젊음의 거리 조성 사업’을 벌였습니다. 

종로 관철동 '젊음의 거리' 모습. 사진 왼쪽은 1988년, 오른쪽 올해 1월의 풍경이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강대호

이때의 사업으로 젊음의 거리에는 노점을 양성화한 구역이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기사들을 참고하면 노점상 96개가 입주했고 하루 20여만 명의 젊은이들이 찾는 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언제부터 ‘젊음의 거리’라 불렸을까요? 1988년 서울 올림픽 즈음해서 이곳에서 ‘젊음의 거리 축제’가 벌어진 걸 보면 최소한 1980년대부터 이 거리를 ‘젊음의 거리’라 불렀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종각 일대는 1970년대에도 젊은 세대가 많이 모이는 장소였던 걸로 보입니다.

종각 일대에 젊은 세대가 모이는 이유 중 하나는 각종 학원이 몰려 있어서였습니다. 지금의 먹자골목 한가운데에 있었던 시사영어학원이 특히 유명했습니다. 그 건물이 아직 있는데 입구에는 ‘1961년부터 이 땅의 영어교육을 선도해온 어학의 전당’이라고 쓰인 명판이 붙어 있습니다. 

과거 시사영어학원이 있던 건물 입구에 붙은 명판. 이 건물에 시사영어학원이 있었다는 흔적이다. 사진=강대호

과거 시사영어학원 인근에는 먹자골목이 형성돼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사영어학원이 있었던 건물 1층과 2층에서도 식당이 영업하고 있습니다. 종각 뒤편 먹자골목은 나름 상권이 형성된 듯 보이지만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장사가 시원찮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음의 거리의 노점상 구역에도 빈자리가 많이 보입니다.

대로변에 나가보면 종각 일대 상권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임대’라고 써 붙인 빈 점포는 물론 건물 통째로 비어 있는 곳도 꽤 보입니다. 

대표적인 곳이 2016년까지 맥도날드 매장이 있던 건물입니다. 그 후에 커피 전문점인 할리스 매장이 들어섰지만 2021년 4월에 점포가 철수하고 쭉 비어 있습니다. 이 건물터는 과거에 우미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올해 1월 말 종로 대로변의 통째로 빈 건물. 2016년까지 맥도날드가 있었고 2021년 4월까지는 커피 전문점인 할리스가 있었던 건물이다. 사진=강대호

'만남의 장소' 대명사였던 종로서적

종각 일대에 젊은이들이 많이 몰렸던 건 ‘종로서적’도 한몫했을 겁니다. 종로서적은 1948년 종로의 대한기독교서회 건물 1층에 개관한 ‘종로서관’을 전신으로 해 1963년에 ‘종로서적센터’로 개점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대형서점이었습니다.

20세기 들어 종각 일대는 서점이 많아 ‘책전거리’라 불렸었고 서점이 많은 종로 일대는 한국 근대 출판 및 도서 유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종로서적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고요. 한국전쟁 후 서울 도심의 중심지가 되자 그 중심에 있던 종로서적은 사회문화적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서울이 생활권이었던 중장년 이후 세대 중에는 아마도 종로서적과 관련한 기억을 가진 이가 많을 겁니다. 제 또래가 모인 단톡방에 물어보니 ‘포장’을 언급하는 이가 유독 많았습니다. 

종로서적 전시회에 전시된 종로서적 포장지. 사진=강대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대형서점과 대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사면 서점 자체 포장지로 표지를 싸주었습니다. 계산하는 직원 옆에 포장하는 직원이 따로 있었던 거죠. 빠른 손놀림으로 책이 포장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책을 사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종로서적이 약속 장소로 쓰였다는 추억도 많았습니다. 서점 입구 통로에서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 옆에는 게시판이 있었습니다. 거기엔 약속 변경에 관한 내용이 적힌 메모장들이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강남역 인근의 뉴욕제과 앞이 강남의 약속 장소였다면 강북에는 종로서적이 있었던 거죠.

이렇듯 사람들에게 다양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종로서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대형서점이었고, 그 지위에 걸맞은 일을 벌였습니다. 

특히, 도서 목록을 과학적으로 분류하고 관리했습니다. 종로서적은 출판된 모든 서지정보를 자체적으로 분류 수집하여 <종합도서총목록>이라는 책자를 1970~1990년대까지 발간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서적 정보의 전산화를 선도했습니다. 종로서적은 ISBN과 POS 시스템을 국내 서점업계 최초로 도입했고 이 시스템을 출판사나 다른 서점들에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종로서적은 우리나라에서 책을 가장 많이 전시한 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찾던 나날들이 많은 이에게 추억으로 남지 않았을까요. 학계에 몸담은 이들 중에는 종로서적을 통해 외국 서적을 구한 경험을 가진 이가 많았습니다.

과거 종로서적이 있었던 ‘대한기독교서회’ 건물. 사진=강대호

지금은 해외 직구 사이트를 통해 해외 서적을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외환을 거래하는 게 자유롭지 않은 시절이 있었는데 외국의 서점이나 출판사에 주문해서 외환으로 결제해야 하는 외국 서적 구매는 절차가 복잡했습니다. 

이렇듯 외국환 거래가 자유롭지 않은 국가들에서 이용된 제도가 ‘유네스코 쿠폰’이었습니다. 일종의 국제 어음인데 유네스코 본부에서 할당된 금액의 범위 안에서 단체나 개인이 국제환이나 달러 없이 외국의 학술 도서, 과학 자료 따위를 살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종로서적이 그 제반 절차에 편의를 제공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서점이 생기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가 강남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종로서적은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인터넷서점을 개점하기도 했으나 결국 월드컵의 함성 속에 묻혀 사라져 버렸습니다. 2002년 2월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첫 승을 올리던 날 종로서적 부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종로서적 전시회 포스터

그렇게 종로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종로서적은 문을 닫았습니다. 관철동의 젊음의 거리는 강남 일대나 신촌 일대로 청년들이 쏠리면서 예전 분위기가 아닙니다. 종각 일대에 ‘임대’라는 팻말이 붙은 점포가 늘어가는 모습에서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다만 종로서적을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종로서적을 주제로 하는 전시회가 2024년 3월 17일까지 종각역 3-1 출구 앞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혹시 종로에 갈 일정이 있을 때 잠시 짬을 내 들러보면 어떨까요.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