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51) 영화 ‘서울의 봄’의 배경 수방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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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51) 영화 ‘서울의 봄’의 배경 수방사의 흔적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1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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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입니다. 지난 12월 12일은 영화의 소재이기도 한 군사 반란이 일어난 지 44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영화로 당시의 일들을 알았겠지만, 선배 세대들은 반란이 불러온 퇴행의 역사를 몸소 겪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영화는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에 벌어진 대립과 충돌을 그리고 있습니다. 첨예하게 맞붙은 두 세력은 수경사, 즉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인 수도경비사령부와 관련 깊습니다. 

당시 반란군 측에 수경사의 30경비단과 33경비단이 가담했었는데 반란군 수뇌부가 있던 곳이 바로 30경비단 주둔지였습니다. 반면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은 진압군 측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많은 장면이 30경비단 주둔지와 수경사 사령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장소들은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습니다.

수도 서울을 지키는 임무를 띤 수도경비사령부는 1949년 6월에 창설되었습니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며 이 부대는 수도사단에 배속되며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다 5·16 후 수도방위사령부라는 이름으로 재창설됩니다.

이때 30사단(지금의 제30기갑여단)과 33사단(지금의 제17보병사단)에서 1개 대대씩 차출해 수방사의 30경비대대와 33경비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용산에 있던 수도방위사령부는 1962년 필동으로 옮겼고, 1963년에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름을 변경하게 됩니다.

수경사 사령부가 필동에 자리 잡은 건 그 자리가 원래 군부대 터라 주둔하기 여러모로 편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 일본공사관 경비 명목으로 조선에 주둔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점차 규모를 늘리며 1904년에는 한국주차군사령부로 확대했습니다. 그 사령부가 필동에 있었습니다. 

1908년에 일본군 사령부가 용산으로 옮겨간 후에는 일본군 헌병대 사령부가 필동에 주둔했습니다. 해방 뒤에도 한국군의 헌병대가 필동의 옛 일본군 헌병대 터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 수도경비사령부가 주둔했고요.

수경사의 주력 부대인 30경비대대와 33경비대대는 차지철이 대통령 경호실장이 된 1974년에 30경비단과 33경비단으로 승격됩니다.

경복궁 서쪽 담장에서 바라본 청와대. 이 담장 너머인 경복궁 서북 측 태원전 영역에 수방사 제30경비단이 주둔했었다. 사진=강대호

수도경비 대신 대통령 경호가 주업무

수도경비사령부는 ‘수도 경비’를 부대 이름으로 내세웠지만 주된 임무는 대통령 경호였습니다. 30경비단과 33경비단의 주둔지를 보면 그 성격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30경비단은 청와대와 마주하는 경복궁 경내에 주둔했고 33경비단도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 주둔했습니다. 

경복궁의 기존 건축물을 헐고 군사 시설이 들어선 건 일제강점기까지 그 역사가 올라갑니다. 즉 30경비단 주둔지는 예전에 군부대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30경비단의 주둔지는 지금의 경복궁 태원전 영역입니다. 경복궁의 서북쪽 영역으로 청와대 사랑채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바로 담장 너머입니다. 그러니까 청와대 코앞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경복궁의 태원전은 조선 왕실의 빈전, 즉 국상 때 관을 모시고 빈소를 차리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훼철돼 다른 용도로 쓰였습니다.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태원전은 1915년에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허물렸고, 1929년 9월부터 10월까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의 주요 전시관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1929년 경복궁 경내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기념 사진엽서. 태원전 영역에 설치된 축산관과 수족관 사진이 실렸다. 사진 제공=서울역사아카이브

조선박람회 당시 태원전 영역에는 축산관과 수족관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가 남아있습니다. 그 후 태원전 영역에는 조선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경비하는 일본군 부대가 주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과거를 가진 태원전 터에 수경사 30경비단 주둔지가 들어섰고, 1979년 12월 12일에는 반란군의 본부로까지 쓰이게 된 거죠. 

한편 수경사는 1984년에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름이 바뀌며 군단급 부대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수방사는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 과정에서 1996년에 30경비단과 33경비단이 수방사 제1경비단으로 재편성되며 30경비단은 경복궁을 떠났습니다. 

경복궁 태원전 전경. 사진 제공=문화재청

그리고 30경비단 주둔지 터는 태원전 영역으로 복원하게 됩니다. 복원공사는 2005년 말에 종료됐고, 2009년 1월 말부터 일반에 공개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필동의 수도방위사령부는 도심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남산은 물론 주변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습니다. 남산1호터널 입구 근처에 있어서 교통량이 많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담장이 처져 있었고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수방사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필동 일대는 오래도록 군사 보호구역이었습니다. 그러던 1989년 서울시는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을 위해 수도방위사령부 자리를 인수한 후 군사 보호구역에서 해제했습니다.

수방사 있던 자리에 남산 한옥마을 들어서

1991년 수도방위사령부는 남태령 부근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필동의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에는 남산골 한옥마을이 들어섰습니다. 한옥마을 조성 과정에서 서울시는 시내에 흩어져 있던 한옥 다섯 채를 이전하고 복원했습니다. 경내에는 산책로와 전통 정원, 그리고 국악당도 있습니다. 

한옥마을 정문으로 들어서서 오른쪽 산책로를 조금만 걸으면 한 표지석이 나옵니다. ‘수도방위사령부 터’ 표지석입니다. 이 표지석 외에 남산골 한옥마을에 남아있는 수방사 흔적은 없습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수도방위사령부 터’ 표지석. 사진=강대호

표지석 사진을 찍고 있는데 외국인이 다가와 이 돌에 무엇이 쓰여있냐 물었습니다. 한옥마을이 예전에 군부대였다고 설명하니 미처 몰랐다며 놀라워했습니다. 표지석을 보던 한국인 관광객들은 영화 <서울의 봄>을 주제로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운 공원이지만 44년 전 12월 12일에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한국의 운명을 갈랐던 그 날 이곳이 최후의 보루였다는걸 생각하면, 그리고 그날 이후 벌어졌던 몇 년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 안타까운 마음만 들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12·12 군사 반란 당시 진압군 본부와 반란군 본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일제강점기에 군사 시설로 만든 터에 들어선 데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 점에서요. 

그렇게 눈에 보이는 흔적이 사라지고 세월도 40여 년이 흘러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 시절이 희미해져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즈음 탄생한 영화 <서울의 봄>은 전 세대 한국인에게 그때의 일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다지만 잘못된 역사는 후세가 심판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지워져도 역사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남산골 한옥마을 전경. 과거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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