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㊾ 헐리게 될 초고령 아파트와 하천 위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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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㊾ 헐리게 될 초고령 아파트와 하천 위 아파트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0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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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다양한 모습을 꼽을 수 있겠지만 외국인 중에는 도시 곳곳에 늘어선 아파트를 꼽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요? 

그런데 외국인들에게 ‘아파트’라는 단어는 낯설지 모릅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축약해서 쓰는 단어이니까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거 공간인 아파트는 오랜 세월 여러 나라를 거치며 개념과 단어가 변해왔습니다. 

아파트의 어원은 18세기 프랑스 귀족풍 저택의 여러 군데로 나뉜 독립 공간을 뜻하는 ‘아파르트망(appartement)’에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이후 아파르트망을 쪼개 시민들에게 임대하면서 그 개념이 변했다고 합니다. 즉 저택 부속 공간이 아닌 임대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주택으로 바뀐 거죠.

이를 19세기경 미국에서 ‘아파트먼트(apartment)’라 명칭을 붙이고 건축적 재해석도 하며 상품화했습니다. 부동산업자들은 ‘프랑스식 일류 공동주택’이라며 고급 주택으로 홍보했다고 합니다. 

20세기 초반 일본은 미국의 다층 공동주택 개념을 받아들이며 명칭을 ‘아파트’로 줄였습니다. 다만 일본에서는 고급형이 아닌 보급형 공동주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0년대)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 대도시에서 아파트 건설 붐이 일었고, 그 붐은 식민지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쳐 경성을 필두로 평양과 부산, 대구 등에서도 건설 붐이 일었고, 아파트 시대를 부추겼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아파트를 연구한 학자들이 엮은 책 '경성의 아파트'의 한 대목입니다. 경성 등 식민지 조선의 큰 도시에 들어선 아파트는 오늘날과 달리 주로 2층이나 3층 건물이었습니다. 대부분 복도형 구조였고요. 그러니까 복도를 두고 한 줄로 늘어서거나 복도를 중앙에 두고 마주한 방들이 늘어선 구조였던 거죠.

초기 아파트는 주로 한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시설을 갖췄습니다. 한 칸짜리 다다미방에 세면 시설은 있었지만, 외부에 공동화장실이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아파트 중에는 공동 목욕탕을 설치한 곳도 있었고요. 

당시 아파트 외부나 내부 구조로만 보면, 오늘날의 작은 기숙사 건물이나 고시원에 가까운 구조라 지금의 아파트와는 큰 차이가 있는 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제강점기 경성의 아파트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과 독신의 셀러리맨들이 주 타겟층이었습니다고 합니다.

위 도서를 참고하면, 1930년대 경성에 30여 개의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이 수치에서 보듯 경성의 아파트는 도시의 주류를 이루는 주거 공간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거 공간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아파트는 해방 이후 새로운 주거 형태가 되며 우리나라 주택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충정아파트 전경. 사진=강대호

1930년대 지어진 충정아파트

해방 후 전쟁을 거치며 식민지 시절 지어진 아파트는 대부분 헐리거나 다른 용도의 건축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건재하며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물도 여럿 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물은 아마도 ‘충정아파트’일 겁니다.

만약 서울 충정로를 지난다면 동아일보 사옥 건너편에 있는 낡은 초록색 건물이 보일 겁니다. 그 건물이 바로 ‘충정아파트’입니다.

지은 지 무척 오래돼 보이는 ‘충정아파트’는 언제 건축했는지 의견이 갈립니다. 자료에 따라 1931년이나 1932년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다만 확실한 건 건축물대장상 1937년 8월 29일에 준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80년은 훌쩍 넘긴 고령의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1960년대까지는 ‘도요타아파트’로, 1970년대에는 유림아파트로, 지금은 충정아파트로 불립니다. 1960년대 한때 ‘코리아관광호텔’로 용도가 바뀌기도 했고요.

지금 건물의 외양은 원래 모습이 아닙니다. 1979년에 충정로가 왕복 8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아파트 건물 3분의 1이 잘렸습니다. 이때 잘린 쪽에 살던 주민들이 집 앞 복도를 개조해 살림을 꾸리거나 일부는 4층이던 건물을 임의로 증축해 옥상에 터전을 잡았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드라마나 영화의 모티브가 될 만큼 이색적인 정경을 풍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까다롭게 꼬인 재건축 이슈 때문에 종종 뉴스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재건축해야 한다거나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분분했던 거죠. 

충정아파트 외벽. 사진=강대호

하지만 충정아파트는 안전 문제로 철거하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28층 높이에 192가구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됐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습니다. 

서소문아파트, 하천 위에 들어선 아파트

서울 도심 대부분은 거리 구획이 바둑판처럼 생겼습니다. 많은 도로가 똑바르게 건설되었고요. 하지만 완만하게 휘거나 크게 곡선을 이루는 도로도 있습니다. 지형지물을 피해서 그렇게 된 곳도 있지만 그런 곳 대부분은 하천을 복개한 도로일 때가 많습니다.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 적십자병원과 이화여고 옆으로 이처럼 곡선을 이루는 도로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만초천이 흐릅니다. 만초천은 무악재 부근에서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해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 뒤편의 청파로를 지나 원효대교 근방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입니다. 

만초천 흐름의 중간에 서소문아파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초천을 복개한 자리 위에 아파트를 지은 거죠. 그때가 1971년 즈음입니다. 

서소문아파트의 지적도를 보면 ‘천’, 즉 하천부지로 나옵니다. 그래서 서소문아파트 소유주들은 토지세를 내지 않습니다. 대신 하천 점용료를 냅니다. 사실상 하천 위에 건축된 건물이니 소유주들은 건물 지상권만 가진 셈인 거죠. 

이 건물을 양 끝에서 바라보면 똑바르지 않고 휘어 있습니다. 하천 흐름을 따라 지어서 그렇습니다. 길 건너 이화여고 쪽 휘어진 길과 연결하면 옛 만초천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소문아파트 전경. 휘어진 모양은 만초천 위에 지어서 그렇다. 사진=강대호

서소문아파트는 약 100m 길이에 7층 높이의 건물입니다. 1층에는 식당과 카페가 들어섰고 2층부터는 아파트입니다. 일종의 주상 복합 아파트라 할 수도 있습니다.

서소문아파트에는 아홉 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그 입구마다 동 숫자가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서소문아파트는 1동에서 9동까지 있는 셈인 거죠. 그런 아파트 건물 중앙에는 뒤편 골목과 연결되는 통로를 뚫어놓았습니다. 

점심시간이면 인근의 직장인들이 이 통로를 지나 식당들로 향하곤 합니다. 저녁에도 물론이고요. 서소문아파트는 주변 상권을 막는 장벽이 되기보다는 서로를 잇는 교량과 같은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온 듯했습니다.

서소문아파트도 헐릴 예정입니다. 서소문 일대에 ‘주거상업고밀지구’로 개발하는 사업이 계획되었는데 서소문아파트도 그 대상에 들어갔습니다. 다만 서소문아파트 부지는 지목이 하천이므로 건물을 짓지 못합니다. 아마도 도로나 공원이 될 듯합니다.

서소문아파트 옆으로는 기찻길이 지납니다. 서울역과 가좌역 혹은 수색차량기지를 오가는 열차들이 쉬지 않고 오갑니다. 기찻길 옆 동네에는 빈티지스러운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고요. 

그 길을 따라가면 충정로가 나오고 충정아파트도 나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두 아파트 건물이 세파를 거스르지 못하고 헐리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은 물론 급속한 도시화를 겪은 한국의 서울에서 오래도록 주거지 역할을 맡아온 건물들이었습니다. 

재건축 혹은 재개발은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결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속 시원한 결정일 겁니다. 아무튼 두 건물이 헐리면 기억하는 이들이나 찾아보는 자료 정도로 남게 되지 않을까요. 다음 주에는 (제 눈에) 이색적인 옛 아파트 건물들을 다루겠습니다.

서소문아파트 외벽.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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