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이야기⑥] 철도는 국가 통합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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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이야기⑥] 철도는 국가 통합의 원천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06.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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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건설은 영토확장의 마무리 단계

1531년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스페인의 한 군인이 원주민에게 오리노코 강 깊숙한 곳의 황금 마을에 대한 풍문을 들었다. 안데스 산맥 근처 밀림에 황금으로 된 도시에 몸에 황금칠을 한 사람이 산다는 ‘엘도라도(El Dorado)’의 전설이었다. 그 풍문을 들은 지 6년후 스페인 군은 엘도라도를 찾아 안데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황금의 도시를 찾지 못했다.

잉카 제국은 황금의 국가였다. 스페인 정복자 프란스스코 피사로는 군인 180명을 이끌고 잉카의 아타우알파 황제를 알현했다. 그들은 속임수로 잉카 황제를 사로잡았다. 아타우알파 황제는 자신이 갇힌 높이 7m, 너비 6m의 방에 금을 가득 채워 줄 테니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피사로는 또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황금만 챙기고 황제를 목졸라 죽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건설 야욕에 불탔던 스페인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황금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 정복자 피사로의 부하였던 페트로 데 발디비아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금과 은을 찾아 안데스 서안을 따라 내려갔다. 그 긴 여정이 바로 오늘날 칠레라는 국가가 탄생한 모태다. 한편 안데스 산맥을 넘은 군대는 황금을 찾으려는 또다른 포르투갈 군대와 무주쳐 경계를 그었으니, 그 경계가 지금의 브라질과의 국경이다.

중세의 어둠에서 깨어난 유럽은 황금의 대륙을 찾아 나섰다. 투르크 제국에 막혀 육로를 이용할수 없었던 탐험가들은 금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는 인디아와 지팡구(일본)를 찾아 바닷길을 나섰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도 황금을 찾으러 바닷길을 헤매던 탐욕적인 인물이었고, 엘도라도의 환상에 젖어 있었다.

금과 은은 1970년대 금본위제도가 무너지기 전까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공동 화폐였고,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이 희귀금속을 찾아 많은 탐험가가 목숨을 걸고 험로에 덤벼 들었지만, 철은 모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지구상에 철이 풍부하게 존재해 희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엘도라도를 찾으려는 인류의 탐욕이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과 약탈의 원동력이었다면 19세기의 골드러시는 식민지 개척의 역사로 연결됐다.

1832년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유역을 순회하던 무역상이 풍부한 충적토 금광을 발견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른바 ‘골드러시’가 시작됐다. 러시아 정부도 이에 맞춰 시베리아로 영토를 확장하는 동진정책을 확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도 골드러시의 산물이다. 1848년 미국은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지금의 미국영토 4분의1에 해당하는 땅덩어리를 할양받았다. 예정된 영토이양일 9일 전에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금이 발견됐다. 미국 동부의 부랑아들이 금을 찾아 3,000km가 넘는 험난한 여정을 감행해 태평양 연안으로 몰려들었다. 캘리포니아의 금은 금새 고갈됐고, 황금에 눈이 멀었던 개척자들은 다시 부랑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캘리포니아에 인구를 유입시키고, 도시를 건설하게 한 원동력은 바로 골드러시였다.

세계 최대 금생산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시베리아와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보다 뒤늦게 금맥이 발견됐다. 1873년 트랜스발과 스와질랜드 국경에서 소규모 노다지가 발견됐고, 이듬해에 풍부한 노다지가 쏟아져 나왔다. 영국이 이 ‘황금의 나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고, 이로부터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 카이로, 인도의 캘커타(현재의 콜카타)를 연결하는 이른바 ‘3C 정책’이 나오게 된다.

골드러시는 제국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전 세계로의 영토확장을 마무리짓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다음에 필요한 것은 남의 땅(식민지)을 뺏는 제국주의 전쟁과 신개척지의 통합이었다. 이때 금도 은도 아닌 쇠가 필요했고, 그 수단으로 철도가 등장한다.

이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중에도 미국을 통합하기 위한 대규모 작업에 착수한다. 다름 아닌 대륙횡단철도 건설이었다.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동서를 연결해주는 교통망이 거의 없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듯 역마차가 고작이었다. 대량 수송은 파나마 지협을 이용한 석박을 통해서 이뤄졌다. 1862년 링컨 대통령은 ‘퍼시픽 철도 법안’에 서명했고,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와 아이오와의 오마하를 잇는 철도 건설 사업이 시작된다. 이 사업에는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와 ‘유니언 퍼시픽 레일로드’라는 두 회사가 참여하는데, 전자는 세크라멘토를 출발점으로 하고, 후자는 오마하를 출발점으로 하여, 철도 건설을 시작한다. 남북전쟁이 미국의 남과 북을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면, 이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동과 서를 하나로 연결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점에서 철도는 미국 역사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 1869년 5월 10일 미국 대륙횡단철도 개통식.

시베리아 개척에 나선 러시아는 태평양까지 영토를 확장한후 시베리아 남부를 동서 방향으로 횡단하여 유럽 지역 러시아와 극동아시아 지방을 잇는 대시베리아철도 건설에 나선다. 우랄 산맥 동쪽 기슭의 첼랴빈스크에서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트크까지 7,416km에 이르는 이 철도 건설은 대역사였다. 1891년 러시아 황제는 시베리아철도 건설을 결정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공식을 거행했다.

많은 숙련, 비숙련 자유노동자와 함께 시베리아로 유형된 죄수와 중국인이 가혹한 조건에서 건설공사에 내몰렸다. 1898년 12월에는 선로는 이르쿠츠크에 도달했고, 이에 앞서 1897년 12월에는 태평양 연안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사이가 개통됐다. 이로써 시베리아철도는 바이칼호 남쪽 연안의 우회선 구간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철도 연결이 가능해졌다.

영국의 여러 식민 주들이 분산되어 있던 캐나다는 각 주가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자치법)’에 합의했지만, 각 주가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엔 일종의 국가연합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캐나다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는 국가통합에 교통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캐나디언 퍼시픽 철도 건설에 나섰다. 이 철도는 주 대표들이 협상을 거쳐 1881년에 완공됐다. 이 철도가 건설된후 앨버타, 매니코바, 서스캐처원의 평원엔 새로운 이민자가 들어가 땅을 일궈 비옥한 농토를 개척했다. 따라서 캐나디언 퍼시픽 철도 건설은 캐나다를 진정한 국가로 만든 프로젝트였다.

▲ 코레일 열차

우리나라에선 철도가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의해 만들어졌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4년에 경인선에 이어 경부선이 개통되고, 2년후인 1906년에 경의선이 연결되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철도로 연결됐다. 일본은 한반도에 먼저 철도를 놓고, 그 다음에 국권을 빼앗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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