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을 믿은 죄밖에 없어"...전액 배상 촉구
어떤 상품인지도 모르고 전재산 맡긴 투자자
[오피니언뉴스=박준호 기자] 황사비 아래 300여명이 모였다.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에 기반한 주가연계증권(ELS)의 투자자들이다. 지난해 12월 금융감독원, 이달 감사원, NH농협은행에 이은 네 번째 집회다.
이번엔 판매 규모가 가장 큰 KB국민은행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대중의 관심을 끌고 여론을 자기 편으로 돌리기 위한 시위다. 이들은 지난 4개월 동안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 네이버 카페에 모여 집단행동을 계속해 왔다. 주요 활동 내용은 기사 좌표 찍기, 댓글 작업이다.
요구 사항은 하나다. 자신들이 투자한 ELS에서 대거 손실이 발생했으니 원금 전액을 배상하라는 것. 29일 기준 H지수는 5800선으로 판매 당시 1만2000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투자자들의 원금은 반토막 났다.
이들은 은행에서 “홍콩이 망하기 전 까지는 손해 날 일이 없다”며 투자를 권유했다고 말한다. 불완전판매를 주장하며 길거리로 나선 이유다.
29일 12시, 서울 여의도의 KB국민은행 신관 앞에는 성토가 이어졌다. 투자자들은 “조건 없이 팔았으니 조건 없이 배상하라”, “자율배상 거부한다 전액보상 실시하라” 등 구호를 외쳤다. 은행 사옥에는 ‘사기꾼 집단’, ‘악질 중의 악질’ 등의 비난이 날아들었다.
길성주 투자자 대표는 “국민대상 대사기극 원금전액 배상하라. 사기은행 경영진은 계약 원천무효 인정하라”고 소리쳤다. 그는 “우리는 톰슨가젤이었고 은행은 사자였다”며 아무 것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재산을 강탈 당한 순진한 피해자로 자신들을 규정했다.
연단에 오른 발언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원금 손실 가능성을 전혀 알지 못했고 오로지 은행을 전적으로 믿었다고. 은행이 내 자산을 보호하고 증식시켜줄 거라 믿었다고.
기자가 만난 투자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구에서 아침 8시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던 40대 여성은 ”액수를 떠나 삶이 묻어 있는 돈이다. 돈을 크게 벌려고 했으면 증권사에 갔을 것 아닌가”라며 “책임이 있다면 대한민국 은행을 믿은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50대 여성은 “지점장이 나와서 VIP실로 모셔가 투자를 권유했다”며 “부자들은 이렇게 쉽게 돈을 버는구나 싶으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진 않았냐는 질문에는 “설명을 안 해줬으니까 몰랐다”고 답했다.
한 중년 남성은 경상도 사투리가 짙게 묻어나는 말투로 상품의 복잡성, 판매 과정의 부당함, 은행의 악랄함을 소리 높여 강조했다. 그는 “배상안을 수용하겠다는 사람조차 막상 반토막 난 돈을 받으면 뒤로 자빠질 것”이라며 “절대 배상안에 사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투자자들은 KB국민은행 본점에서 항의성 예금 인출, 통장 찢기 퍼포먼스로 시위를 마무리 했다. 피땀 흘려 모은 수천, 수억원을 맡기면서 자신이 가입한 상품이 무엇인지 알아봤다는 이야기는 결국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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