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 상환자 역차별', '총선 포퓰리즘' 등 논란
앞선 3차례 사면이후...신용불량자·대출 연체율 증가
[오피니언뉴스=박준호 기자] 정부가 소액연체자의 연체기록을 비공개하는 이른바 신용사면을 단행한다. 서민과 소상공인의 신용점수를 높여 금융 선택권을 보장하고 경제적 재기를 돕겠다는 목적이다.
시장에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과 여타 성실상환자와의 형평성 문제, 실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 1999년 이래 세 차례 단행됐을 때마다 반복된 논란이다. 외려 채무액 규모가 늘고 연체율도 높아지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금융당국은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대출금 상환이 어려웠던 특수 상황을 감안해달라는 입장이다.
지난 12일 금융위원회는 서민·소상공인의 신속 신용회복 지원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2021년 9월 1일부터 올해 1월 31일까지 2000만원 이하를 연체한 차주가 오는 5월 31일까지 전액을 상환하면 연체 이력·정보를 금융사끼리 공유·활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대상자는 지난달 말 기준 개인 264만명, 개인사업자 17만5000명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이번 신용사면으로 이들의 신용점수가 개인 평균 37점(659점→696점), 개인사업자 평균 102점(623점→725점) 오른다고 밝혔다.
기존에 신용점수가 낮아 제2 금융권을 이용하던 차주들은 1금융권 내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연체 이력 때문에 불법사금융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금융위에 따르면 이번 정책으로 15만명이 카드발급 기준 최저신용점수(645점)를 충족해 신용카드를 발급 받을 수 있게 될 전망이다. 26만명은 은행권 신규 대출자 평균 신용점수(863점)를 넘어 전보다 낮은 금리로 대출이 가능해진다. 7만9000명의 개인사업자는 제1금융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12일 신용회복지원 행사에서 "서민·소상공인이 신규대출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되는 등 정상적인 경제생활로 복귀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당국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조치가 새 출발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시장에는 볼멘 소리가 쏟아졌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기사의 댓글 여론은 다음달 예정된 국회의원 총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그간 연체 없이 잘 갚아 온 차주들을 역차별하는 것이다”, “시중에서 결정되는 신용 문제에 정부가 참여할 권한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김주현 위원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코로나19가 끝난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고물가·고금리가 이어지면서 대출 상환 기회가 제약됐다"며 "모럴해저드라는 비판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어떤 정책이든 양쪽 면이 있으니 사회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봐달라"고 당부했다.
신용사면은 좌우 정치권을 막론하고 역대 총 세 정부에서 단행됐다.
시초는 지난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이다. 당시에는 소액부도로 신용불량 관리 대상이 된 32만명과 IMF(국제통화기금)체제 아래에서 신용불량자가 된 관리 대상 기업 경영자 74만명이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있게 했다.
1000만원 이하의 대출금을 여섯 달 이상 연체한 차주와 100만원 이하의 카드값을 세 달 이상 연체한 개인·기업이 대상이었다. 이를 모두 갚는 조건으로 종전의 금융거래 중지 조치가 모두 해제됐다.
신용사면이 이뤄진 지 불과 1년반만에 신용불량자 수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사면조치에 따른 신용카드 발급기준 충족, 내수진작을 위한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이 맞물린 이른바 카드대란이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1990년 1000만장이었던 신용카드 발급 수는 2002년 1억480만장을 기록했다. 신용카드 사용액은 1998년 63조6000억원에서 2002년 623조1090억원으로 4년만에 10배가 늘었다.
카드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하며 신용불량자 수는 1997년 말 143만명에서 1998년 193만명으로 1년만에 50만명이 늘었다. 2003년 전체 신용불량자 372만명 중 신용카드 불량자가 239만명(60%)였다.
박근혜 정부 역시 IMF의 여진으로 2013년까지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신용불량·신용등급 사면을 추진했다. 외환위기 때 사업실패, 정리해고 등으로 빚을 갚지 못했거나 연대보증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차주들의 연체 기록이 주홍글씨처럼 금융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총 33만명의 부채를 조정, 10만여명의 연체기록을 삭제했다.
지난 2021년 문재인 정부 역시 개인 211만3000명, 개인사업자 16만8000명 총 228만명의 신용사면을 단행했다.
코로나 기간인 2020년 1월1일부터 2021년 8월31일까지 발생한 2000만원 이하 소액연체, 대위변제·대지급 정보가 연말까지 전액 상환된 경우를 대상으로 했다. 개인 신용점수는 평균 24점(678점→702점), 개인사업자 신용등급은 평균 0.5등급(7.8등급→7.3등급) 상승했다.
이 기간 높아진 신용점수를 바탕으로 자영업자의 대출규모는 1년에 80조가량 늘었다. 주춤하던 연체율도 상승전환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신용데이터(KCB)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과 2022년 자영업 대출 잔액은 전년 대비 각각 80조6138억원(14.5%), 74조8335억원(11.7%) 늘었다. 전 금융권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2021년 말 0.52%, 2022년 6월 말 0.56%, 2022년 12월 말 0.66%로 집계됐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단기금융 불안수준을 평가하는 금융불안지수(FSI)는 주의 단계(임계치 8)와 위기단계(임계치 22)를 오가고 있다. FSI는 지난 2020년 25.5, 지난해 24.3, 지난해 11월 19.3로 나타났다. 중장기적 취약성을 나타내는 금융취약성지수(FVI)는 최근 6년 평균 39.1을 웃도는 43.6(지난해 2분기 기준)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다중채무자이면서 저소득(하위 30%), 저신용(신용점수 664점 이하)인 취약차주가 전체 차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3분기 말 6.5%로 1분기 6.3%대비 0.2%포인트 상승했다. 취약차주가 보유한 대출이 전체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5.1%에서 5.2%로 높아졌다.
지난해 12월 보고서는 "가계대출의 연체율이 저소득·저신용이면서 3개 이상의 기관에서 대출을 이용 중인 취약차주나 비은행금융기관 차주를 중심으로 상승하고 있다"며 "가계신용 증가세도 기대만큼 둔화하지 않고 있어 중장기적 관점에서 금융시스템 내 잠재 취약성을 높이고 가계의 소비여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분석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소상공인들의 자금 수요는 많은데 그간 쌓인 부채로 신용점수 하락과 고금리 상황 등에 실제 대출 실행은 되지 않고 있다”며 “신용사면이 이뤄지면 결국 회수 가능성이 낮은 채권을 금융권이 떠안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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