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산 넘어 산'...의료기관·보험업계, 중개기관 선정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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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산 넘어 산'...의료기관·보험업계, 중개기관 선정 대립
  • 박준호 기자
  • 승인 2024.02.05 1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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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개발원vs핀테크 업체...당국·보험업계와 의료계 대립
중개기관, 10월 보험업법 개정 이후 네 달 가까이 미정
"선정시 업계 주도권 쥐고 위상 달라져"...경쟁 심화
실손보험 그래픽. 사진=연합뉴스

[오피니언뉴스=박준호 기자] 실손보험 청구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는 제도가 시행 8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착수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보험사와 의료기관 사이에서 정보를 매개해줄 곳이 결정되지 않아서다.  

보험업계는 보험개발원을, 의료계는 민간 핀테크 업체를 중개기관으로 선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금융당국은 보험개발원 외에는 대안이 없다면서도 복수 선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과 보험업계, 의약계는 지난 1일 해당 중개기관을 정하기 위해 모였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2월과 지난달 11일에 이은 세 번째 협상이 연속 결렬된 것이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직후부터 연말까지 중개기관을 정하기로 한 바 있다.

중개기관은 병원에게서 환자 정보, 진료 기록, 진료비 계산서, 영수증, 진단서 등을 받아 보험사로 전달해주는 정보전송 대행기관이다. 선정이 미뤄지면 전산시스템 개발도 늦어져 실행에 차질이 생긴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여기서 더 지연된다면 구축 과정 등을 감안했을때 아예 연내 시행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당초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중개기관으로 추진했다. 제도 도입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다.

심평원은 병원의 급여 항목을 심사하는 곳으로 전국 병의원과 약국 데이터, 전산 인프라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 당장 보험사와 전산만 연결하면 바로 중개 기관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개기관 시스템 구축에 드는 비용을 모두 보험업계가 책임지는만큼 보험사 부담도 줄일 수 있다.

당시 의료계는 병의원에서 제출하는 실손보험 청구 서류들이 심평원으로 모이면 비급여 항목에도 직접 간섭할 수 있게 된다며 결사반대했다. 비급여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의사 재량권이 인정돼 가격 통제를 받지 않는 항목이다. 비급여 항목을 심평원이 들여다 보면 진료비 청구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 보건복지부 역시 공기관이 청구 역할을 해선 안된다는 데에서 의료계와 의견이 일치했다.

당국과 보험업계는 한발 물러나 보험개발원으로 선회했다.

금융감독원 출신인 허창언 보험개발원장 역시 중개기관 유치에 발벗고 나섰다. 허 원장은 지난해 2월 취임 100일차 기자간담회에서 ”의료계에서 반대하는 심평원을 대신해 청구 간소화 중개기관을 맡겠다”며 “막대한 양의 보험 정보가 개발원에 집중되지만 한 건의 보안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지난 1일에도 “전송대행기관으로 선정되면 개발원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이라며 "전체 직원 270여명이 하나의 전담조직(TF)이 돼 준비하고 있다"고 어필했다.

의료계는 개발원에 축적된 실손보험 청구자료가 심평원으로 넘어갈 것을 의심했다. 또 환자들의 민감한 의료 정보가 보험업계와 가까운 기관으로 흘러간다면 실손보험 가입 거절이나 보험금 지급 거절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보험개발원은 보험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사단법인이다. 20개 손보사, 22개 생보사를 회원사로 두고 있으며 비상임이사(사원대표)는 편정범 교보생명 대표, 김성한 DGB생명 대표, 홍성우 삼성화재 대표, 배성완 하나손보 대표가 맡고 있다.

금융당국은 보험 가입자의 의료 정보를 민간 기업에 맡기는 게 더 걱정이라는 입장이다.

의료계가 중개기관으로 밀고 있는 곳은 민간 핀테크 업체 지앤넷이다. 지앤넷은 전체 병의원 절반가량이 사용하고 있는 전자차트 프로그램(EMR) ‘의사랑’과 연계 중이다. 의사랑은 진료 기록과 의사의 판단을 담고 있는 전자 기록체계로 현재도 환자 동의시 여기서 실손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

의료 IT업체들은 이미 형성된 환경만으로 충분하다며 막대한 비용을 수반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김동헌 지앤넷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17일 의약 4단체와 의료 IT(정보기술)업체들이 모인 자리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의료계 생태계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제와서 정부가 직접 나서 청구방식을 강제화하는 것은 국민이 아닌 보험회사를 위한 조치일 가능성이 크다”며 “민간보험인 실손보험에 왜 공공성을 지닌 중개기관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표했다.

결국 금융당국은 복수의 중개기관을 선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보험업계와 의료계가 원하는 기관을 한 곳씩 선정하는 식이다. 다만 이는 효율성 문제와 비용 대비 성능을 담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은 가입자가 3900만명에 달하는 만큼 중개기관 선정시 쥘 수 있는 업계 주도권이나 달라지는 기관 위상 등 때문에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의료기관이 전자적으로 전송할 수 있도록 전산화하는 방안이다. 병원 등 의료기관은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환자의 전송 요청에 따라야 한다. 전산화한 서류는 의료기관에서 중개기관을 거쳐 보험사에 전달된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진료 후 서류를 따로 발급받을 필요 없이 중개기관을 통해 병원에 보험금 청구만 하면 된다.

국회 정무위원회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분석에 따르면 지난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환자들이 청구하지 않은 실손보험금 추정액은 총 8282억원이다. 지난 2021년 2559억원, 2022년 2512억원, 2023년 3211억원으로 연평균 2760억원에 달한다.

미청구 금액을 지급해야 하는 만큼 보험사가 당장 지출해야 할 보험료는 커진다. 하지만 보험금을 탈수록 보험료를 더 내야 하는 4세대 실손보험의 할증 특성으로 장기적으로는 보험사에 이득이다.

‘실손보험 간소화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은 지난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 이후 14년 만인 지난해 6월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 지난해 10월 본회의를 통과했다. 중개기관 선정은 시행령(대통령령)에 위임하도록 하면서 지금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개정안은 정부의 법률 공포 절차를 거쳐 1년 뒤인 오는 10월 25일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된다. 병상 30개 이상 병원급을 시작으로 30개 미만인 의원급 의료기관으로 확대된다. 약국은 내년 10월 25일부터 도입한다.

중개기관 선정을 위한 다음 회의는 이달 중순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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