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현종 옹립하고 재상에 오른 고구려인 왕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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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옹립하고 재상에 오른 고구려인 왕모중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3.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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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의 노비로 시작해 당나라 군권 장악…환관들의 모함으로 실각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왕모중(王毛仲)이란 재상이 있었다. 그는 고구려인이었다.

그는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다음 적국으로 끌려간 유민의 후손으로, 당 현종을 황제로 옹립하고 군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출생연도는 미상, 죽은 해는 731년이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중국어판은 왕모중에 대해 “高句丽人,唐朝禁军将领”이라고 시작한다. 고구려인으로, 당 조정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금군(禁軍)의 대장(장령)을 맡아 병권을 장악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그는 고구려인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나라가 망한후 노예로 끌려간 유민의 후손이 재상까지 올랐다면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을 것이다.

당 현종은 누구인가. 본명은 이융기(李隆基).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위황후(韋皇后)로 이어지는 여제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개원의 치’(開元之治)를 연 당나라 제6대 황제다. 당 현종이 황제가 되도록 군사적 뒷받침을 한 인물이 왕모중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환관들의 모함과 황제의 견제로 실각하고 말았다.

 

▲ 당나라 영토 /위키피디아

 

① 노비 출신

 

중국 사서인 「구당서」(舊唐書)에 ‘왕모중 열전’이 별도로 있다. 왕모중 열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왕모중은 고려인이었다. 부친은 유격장군 직에 있던 왕구루(王求婁)였으며, 직무와 관련한 죄로 관직을 빼앗겼고, 가산도 관부에 몰수되었다. 모중은 이에 현종의 노복이 되었다. 모중은 성품이 영민했기에 현종이 임치왕(臨淄王)이었던 시절에 항상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부친이 저질렀다는 ‘직무와 관련한 죄’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그로 인해 왕모중은 임치왕에 봉해진 황자 이융기의 노복이 되었다. 왕모중은 주인 이융기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다.

이융기의 아버지는 당나라 5대 황제 예종(睿宗)으로, 측전무후에게서 황제 자리를 빼앗긴 인물이었다. 이융기는 측천무후의 손자였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몰락한 황자의 신세였다.

하지만 이융기는 야심이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는 사냥을 즐겼고, 용맹한 사람을 만나면 돈과 음식을 하사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의 눈에 노비이지만, 총명하고 성실하며 건장한 용모를 가진 왕모중이 들어왔다. 왕모중이 고구려의 후예로 기마와 궁술에 능숙했기 때문에 이융기는 단박에 왕모중을 핵심 수하로 삼게 된다.

 

② 당 현종 쿠데타의 핵심역할

 

이융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710년이다. 측천무후가 죽고 황제가 된 중종(中宗)이 황후 위씨(韋后)와 딸 안락(安樂)공주에 의해 독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종의 조카인 이융기는 “위후 일파를 제거해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병했고, 그 거병에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 왕모중이다. 왕모중은 이융기의 쿠데타 과정에서 황궁 수비대를 사전에 장악해 거사를 성사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융기 쿠데타군은 왕모중의 활약에 힘입어 황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위후와 안락공주를 살해하고, 중종 시해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거사에 성공한 임치왕 이융기는 아버지를 황제로 올리고, 자신은 평왕(平王)으로 왕호를 높인뒤, 주요 관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심었다. 이때 왕모중은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장군으로 파격적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③ 역모 분쇄

 

▲ 당 현종 초상화 /위키피디아

쿠데타에 성공한 이융기는 맏형 이성기를 제치고 태자가 됐다. 이융기는 반란군의 주축이었던 좌우영(左右營)을 격상시켜 이름을 용무군(龍武軍)으로 바꿨다.

당서(唐書) 왕모중전(王毛仲傳)에는 용무군에 관해 “당시 양가 자제들은 군역과 요역을 회피했다. 하지만 용무군만은 예외였다. 뇌물을 바치며 앞을 다퉈 들어가려 해서 부대 규모가 수천명으로 늘었다. 용무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고 썼다. 반란에 성공한 710년에 왕모중은 3품의 대장군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주군 이융기는 2년후인 712년 아버지의 양보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가 제6대 현종이다.

왕모중의 역할은 현종 즉위 이듬해인 713년 다시 부각된다. 이융기가 황제로 등극했지만, 권력의 실세는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였다. 태평공주는 7명의 재상 중 5명을 장악해 권력을 휘두르며 현종을 폐위할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이때 왕모중은 태평공주 측에서 병사를 동원해 7월 4일 궁궐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극비정보를 입수했다. 역모가 일어나기 하루전인 7월 3일, 왕모중과 그의 병사 300명을 동원해 공주 일행을 주살해 버렸다. 분노한 현종은 재상 숙지충을 비롯해 태평공주 측근 전원을 죽이고, 공주의 아들들까지 모두 주살한 뒤, 이미 세상을 뜬 공주 망부(亡夫)의 시체를 꺼내 부관참시했다.

사태를 처리한 사람은 왕모중이었다. 그는 보국대장군·좌무위대장군·검교내외한구 겸 지감목사로 임명되되고, 국공(國公)의 작위와 함께 저택과 식읍 500호를 받았다. 진압에 공을 세운 인물 중 최고의 포상이었다.

 

④ 황제의 총애

 

당나라 사서에는 왕모중이 맡은 검교내외한구라는 직책에 대한 기술이 있다. 이 직책은 현종의 양아들로 총애받던 안록산이 받았던 요직이라고 한다. 황실과 군사 양쪽에 말을 공급하는 임무다.

당대에 말은 군사력의 기둥이었다. 왕모중이 그 직책을 맡은후 24만마리이던 병마의 수가 43만마리로, 3만5,000두였던 소가 5만두로, 1만2,000마리였던 양이 28만6,000마리로 늘었으며, 그는 죽은 짐승도 버리지 않고. 가죽을 팔아 비단 8만필을 구입했고, 동맥· 목숙 등의 사료를 준비해 겨울을 대비했다고 한다.

왕모중은 사욕을 부리며 재물을 축적하지 않고, 매년 수만석의 잉여 물자를 확보해 황제에게 바쳤다. 현종은 왕모중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현종은 노비 출신이었던 왕모중을 연회석에서 황제의 형제·자식들과 나란히 앉게 하며 신뢰를 보였다. 현종은 연회 때 왕모중이 보이지 않으면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와 밤새워 대화를 나누는 일도 많았다고 당나라 사서는 기록했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왕무종에 대해 현종의 총애는 하늘 높은 곳까지 치달았다. 현종은 왕모중의 업적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으며, 이씨라는 여인을 부인으로 하사했고, 그녀에게 국부인(國夫人)의 칭호를 내렸다. 또 왕모중의 어린 아들에게는 5품 벼슬을 제수하고 황태자와 함께 놀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왕모중은 승진을 거듭해 721년 당나라 북부의 군권을 장악했고, 4년 뒤인 725년엔 1품 고관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돼 ‘3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⑤ 토사구팽

 

황제에 오른 현종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이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세력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왕모중은 2인자였다. 2인자는 항상 몸을 낮춰야 했다. 그의 주변에는 정적들로 가득찼다.

황제의 총애는 환관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왔다. 왕모중도 환관들에게 모욕을 주곤 했다. 환관들은 왕모중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 중심이 된 사람이 훗날 현종에게 양귀비를 소개하는 환관 고력사(高力士)였다.

환관들은 집요하게 틈을 노렸다. 729년 6월, 용무군 대장 갈복순의 아들과 왕모중의 딸이 결혼을 치렀다. 환관들은 두 권력자의 혼인이 왕모중의 군권 장악 기도라고 황제에게 꼬여 바쳤다. 용무군은 현종이 쿠데타를 하던 주력군대였다. 이 군대를 왕모중이 장악한다면 역모가 가능하다.

환관들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현종은 군권을 쥔 아랫것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염려했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번 변한다. 지금이야 충성하지만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일이다. 역사는 그것을 입증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현종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730년 왕모중은 황제에게 병부상서 자리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병부상서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으로, 당나라의 군사력 전체를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현종의 결심이 굳어졌다.

이때 상소문이 올라왔다.

“왕모중이 태원의 무기와 갑옷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현종은 먼저 칼을 뽑았다. 731년 정월, 현종은 왕모중을 따르는 장군들과 왕모중의 아들들을 강등시켜 변방 한직으로 내모는 인사를 단행하고, 왕모중을 귀양보냈다.

왕모중은 귀양을 가던 중에 자결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양모중은 현종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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