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 다시보기⑩…예언자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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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다시보기⑩…예언자 애널리스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2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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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가, 전략가,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이 막강한 영향력 행사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밤새 뉴욕에서 들어온 소식이 마음에 걸렸다. 뉴욕증시의 다우존스 지수가 300 포인트(3.4%)나 폭락한 것이다.

그녀는 뉴욕 본사에 팩스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건강하다. 현재의 주가가 저평가돼 있으므로 지금이 주식을 사야 할 때다.”

다음날 뉴욕 증시는 오르고 내리기를 수차례 반복한 뒤 마침내 다우존스 지수는 60 포인트나 상승했다.

이 스토리는 1998년 8월 4일과 5일에 있었던 일이다. 주인공은 월가의 간판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의 여성 투자전략가 애비 코언(Abbey Cohen)이다. 46세의 여성에 의해 뉴욕 증시가 폭락 하루만에 상승세로 반전했다.

전날 폭락은 프루덴셜 증권의 투자전략가 랠프 아캄포라(Ralph Acampora)씨가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는 한해 전까지만 해도 뉴욕 증시가 상승세를 지속, 다우 지수가 조만간 1만을 넘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마음을 바궜다. 그는 4일 오후 3시께 경제뉴스 전문 케이블 채널인 CNBC에 출연, 주가가 20%나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미국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고, 증시에 거품이 많이 끼어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캄포라의 발언이 케이블을 타고 월가에 전해지자 투자자들은 즉각 ‘팔자’로 돌아서 주가가 폭락했다.

다음날 뉴욕 증시는 코언과 아캄포라의 대결이었다. 멀리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에서 휴가를 즐기던 페인웨버사의 전략가 에드워드 커시너씨도 코언을 지지하는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다. 뉴욕증시는 폐장 45분을 앞두고 급상승, 투자자들은 코언의 손을 들어줬다.

세계 최대금융시장인 뉴욕 월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워렌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와 같은 큰손이 아니다. 바로 다수의 군소 투자자들에게 미래의 경제를 예측해주는 코언이나 아캄포라와 같은 사람이다. ‘분석가(analyst)’ 또는 ‘전략가(strategist)’, ‘전문가(expert)’라고 불리는 이들 집단이 월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10년전만 해도 이들 전문가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 용어를 써가며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 고객들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돈을 주무르는 것은 펀드매니저들의 일이고, 그들은 펀드매니저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직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분석가 또는 전략가들은 1990년대 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 증시가 10년째 호황을 구가하면서 거래량이 폭주하고, 증시에 몰려든 투자자들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토대로 중요한 투자를 결정하는 경향이 높아졌다.

분석가들의 역할은 이전에는 장기전망을 내놓는데 불과했지만, 인기가 높아지면서 단기전망을 내놓음으로써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펀드매니저 한사람이 수백만 달러를 운용하지만, 유능한 분석가는 수천만, 수억 달러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가 때문에 오히려 더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또다른 예를 들어 보자. 1997년 8월 22일의 일이다. 미국 최대 증권회사인 메릴린치사에서 반도체 전문가로 활동하는 토머스 컬락씨가 인텔사에 관한 무언가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증시가 열리기 전에 인텔사의 투자등급을 한 단계 떨어뜨렸다. 그의 평가는 곧바로 메릴린치의 전산망을 타고 퍼져나갔다. 메릴린치가 거느리고 있는 연금, 뮤추얼 펀드, 헤지펀드등이 일제히 인텔 주식을 팔았다. 그날 상오 인텔사의 주가는 주당 7%나 폭락했다.

그날 인텔 주가 하락을 멈추게 한 사람은 컬락씨의 경쟁자로 모건 스탠리에서 일하는 분석가 마크 에델스턴씨였다. 그는 다른 정보를 인용해 인텔의 등급을 상향 조정했다. 그날 인텔에는 아무일도 없었다. 분기별 영업보고를 제출하지도 않았고, 인사이동 또는 생산에 관한 발표도 없었다. 다만 반도체 애널리스트들의 평가에 의해 주가가 놀아났던 것이다.

월가는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컬락이 분석자료를 내놓으면, CNBC 방송이 속보로 전달, 시장에 즉각 영향을 미쳤다.

분석가들의 대우도 갈수록 좋아졌다. 골드만 삭스의 코언씨의 직급은 회장까지 올라갔다. 스타급 애널리스트들을 잡으려고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지급하며 투자회사들 간에 스카웃 경쟁이 치열하다. 모건스탠리사는 컬락씨에 대항하기 위해 프루덴셜 증권에서 일하던 반도체 전문가 에델스턴씨를 스카웃했다. 톱 클래스 분석가들의 연봉은 1980년대엔 25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으나, 10년후엔 200만 달러 수준으로 웬만한 스타급 펀드매니저들과 맞먹었다. 모건스탠리 증권에서 인터넷 주가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 애널리스트 메리 미커(Mary Meeker)씨는 1999년에 1,50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아 20세기 애널리스트로는 사상 최고의 연봉을 기록했다.

미국의 시중 은행들은 엄청난 다운사이징(인력축소)을 단행하면서도 전문 분석가를 많게는 몇 백명씩 고용하고 있다. 업종별로 전문가가 있고, 지역별로도 전문가가 있다. 채권, 증권, 선물, 파생금융상품 별로 따로 전문가를 두고 업종별, 지역별 전문가와 정보를 교환하며 투자방향을 결정한다. 1997년 10월 27일 미국 증시가 폭락했을 때 월가 전문가들은 기관투자자자들에게 일제히 주식을 사라고 권유, 주가를 반등시켰다.

 

▲ 월가의 뱅커들 /뉴욕 뱅커스 그룹 누자 매뉴얼

 

다시 월가의 전설적인 예언가 코언이라는 여걸로 돌아가 보자.

그는 명석한 판단력 하나로 월가의 많은 열성 팬을 확보하고 있다. 당대의 미국 언론들은 그를 ‘월가의 예언자’, ‘맑은 날씨의 기상예보자’라고 표현했다.

코언의 명성이 월가를 뒤덮은 것은 1995년부터다. 남성들이 판을 치는 월가에서 그는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물리쳤다. 1995년 11월 다우지수가 4,800이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증시 비관론을 폈으나, 그는 “이번 호황사이클은 길다”며 ‘매입(Buy)’을 주장했다. 1997년 10월 26일 다우지수가 사상 두 번째로 폭락했을 때도 주가 상승을 예언했다. 투자자들은 주가가 떨어지면 으레 골드만 삭스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육성녹음에 귀를 기울였다. 월가에서는 코언이 비관론으로 돌아서면 증시 대폭락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코언은 “주가는 경제 펀더멘탈에 의해 결정될 뿐, 전략가의 분석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코언은 그 흔한 박사학위도 없었다. 코넬대에서 경제학과 컴퓨터를 전공하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한 것이 고작이었다. 경제학이 너무 이론적이고, 현실감각에서 떨어진다는 것이 박사를 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의 정확한 예언은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다. 평일에 13시간씩 자료를 분석하고, 일요일에는 집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시간을 내 설거지와 빨래도 하고, 남편과 두딸과 함께 수다도 떠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코언은 미국 경제를 느리지만 흔들리지 않는 ‘초대형 유조선(Supertanker)’에 비유했다. 하이테크 산업이 이끄는 현재의 호황이 과거의 사이클과 달리 오래 지속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그녀는 월가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골드만 삭스의 간판스타이자, 뉴욕증시 호황을 이끄는 리더로 군림했다.

 

월가의 아시아 전문가들은 아시아 금융시장에 큰 영향력을 미친적이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메릴린치나 골드만 삭스의 아시아 전문가들이 한국 외환보유액을 분석한 리포트가 한국 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한국이 금융위기에 휘말리면서 국제시장을 훤히 꿰는 전문가들이 부족했다. 소수의 국내 전문가들이 있어도 과천의 관료조직이 그들의 지적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또 당시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자딘 플레밍사의 스티븐 마빈이라는 분석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그는 미국 언론과 뉴욕의 아시아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마빈씨가 한국 경제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 외국 투자자들의 한국 투자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한국 경제 펀더멘털이 취약하고, 기업의 이익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주가가 바닥에 가는 것은 당연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 마빈씨를 능가하는 분석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 전문가가 있어서 한국 경제와 기업의 실정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정확히 진단해 주지 못했다. 마빈씨 논쟁은 어쩌면 한국 금융시장의 전문가 집단의 부족을 반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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