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처 인사이트] 학교폭력, 폭로에 공소시효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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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처 인사이트] 학교폭력, 폭로에 공소시효란 없다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1.02.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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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맞은 놈은 다릴 뻗고 자도, 때린 놈은 그러질 못해”

어렸을 적 할머니께서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다. 그것이 세상사는 이치라고, 그래서 세상살이 공평한 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살면서 마주한 많은 상황은 맞은 사람은 움츠러들고, 때린 사람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피해자가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는 듯, 그들은 가해자에게 무참히 짓밣힌 채 일어서기 힘든 패배자였다.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난다 해도 멍 든 마음은 좀처럼 치유하기 힘들다. 시간이란 약도 부질없을 때가 있다. 

시대의 변화를 탓해야 할까. 할머니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이치’는 단지 희망사항이었던 것일까. 과연 세상은 공평한 곳인가.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공평하거나 공정하길 기대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달은 것이 삶에서 체득한 ‘불편한 진실’이다.

현재를 사는 가해자와 과거에 갇혀버린 피해자

“괴롭히는 사람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죽고 싶다” 

소속팀 선배를 저격하는 이다영의 SNS글은 급기야 배구계 ‘학투(학교폭력 미투) 쓰나미’로 번졌다. 피해자들이 이들 자매의 과거를 폭로하는 계기가 됐으니 부메랑도 이런 부메랑이 없다.

10여 년 전 이재영, 이다영은 재미있어서 피해자들을 괴롭혔던 것일까. 자신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이들이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본래 때린 사람은 잊고 살아도 맞은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법. 그들이 과거를 망각하고 코트를 훨훨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 피해자들의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지옥 같았던 그 시절의 환영(幻影)이 떠올랐을 터. 가해자들이 현재를 살고 미래를 그릴 때 피해자들은 과거에 갇혀있었다. 

학폭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철없던 시절’을 운운한다. 그 시기의 잘못이니 그럴 수 있다는 것인가. 폭로 이후에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반성하며 살겠다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몇 줄의 사과문이 면피용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진정성’ 여부는 행동이 따를 때 논할 수 있는 법이다.

학교폭력은 엄연한 ‘범죄행위’다. 하필 세월이 흘러 공소시효가 끝났으니 법으로 단죄할 순 없지만 그 무서운 ‘국민정서법’은 배구계에서 가해자의 ‘영구퇴출’을 원한다.

배구선수 이다영(왼쪽) 이재영 자매는 과거 '학교폭력' 전력으로 무기한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사진=연합뉴스

실력이 인성을 덮어버린 스포츠계

“현재 두 선수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다. 징계라는 것도 선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됐을 때 내려야 한다고 판단한다”

두 자매가 학폭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소속구단의 방침은 어이상실 그 자체였다. 피해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가해선수에 대한 ‘보호 특혜’는 그야말로 구단의 이기심일 뿐이다. 

징계라는 건 잘못에 대한 처벌이다. 그런데 처벌보다 보호가 우선이라는 건 그들이 팀 성적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실력자들이기 때문일 게다. 실력이 인성을 덮어버리는 스포츠계의 몹쓸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배구계 학폭 사태는 체육계의 ‘성적 만능주의’를 또다시 소환시켰다. 실력이 곧 권력이 되는 곳에서 인성 따위 개나 줘버린 능력자들은 잘못을 저질러도 특혜 받는 대상이다.

그러니 ‘도덕불감증’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승자만능 시스템’ 하에서 ‘인성 제로’의 선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외 여러 외신들이 스포츠 강국의 민낯이라며 자매의 학폭 사건을 보도했다. 성적 줄 세우기를 통해 국위선양 했던 체육계가 제대로 국가망신을 시킨 것이다.

자매는 무기한 출장정지에 국가대표 자격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한국배구연맹(KOVO)은 앞으로 학폭 전력이 있는 선수는 프로행을 막겠다는 방침이다. 소관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학교 운동부 징계이력’을 통합관리 하겠다고 밝혔다.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없는 스포츠계를 분노한 여론이 서둘러 바꿔놓은 셈이다. 대중은 '인성 없는 실력' 따위는 원치 않는다. 

불행히도 여전히 학교폭력은 현재진행형이다. 가해학생들이 살게 될 미래가 지금, 과거에 발목 잡혀 선수생활 위기에 처한 이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가혹한 경고라고?

반드시 반면교사(反面敎師) 삼기를 바란다. 폭로에 공소시효란 없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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