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 해운업② - 강진 옹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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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 해운업② - 강진 옹기마을
  • 전우홍
  • 승인 2015.12.0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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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경 옹기시장 쇠퇴기의 봉황리 포구의 옹기돛단배

 

장보고의 해상 무역의 저력은 청자생산과 함께 진취적인 뱃사람들로 구성된 해상 세력 있었기에 장보고는 해상 무역왕 이란 명칭을 얻을 수 있었다. 강진의 청자와 해운력은 2007년 태안 마도부근 해저에서 800여년 만에 23,500여점 청자와 함께 발굴된 목간에는 탐진(강진)에서 개경(개성)으로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강진은 1980년 이후 도로망의 현대화와 자동차의 발달로 해상 교통수단의 가치와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이곳은 장보고와 청해진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옹기와 돛단배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바닷길을 통한 토속 해운업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흔적으로 마지막 돛단배의 사공인 신 연호님은 그 옛날 뱃사람들의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칠량독점’이 옹기마을 ‘봉황리’의 본래 이름이었고, 일본강점기인 1940년에 특정 생산단지의 부락이름을 없애고 좋은 이름인 ‘봉황리’로 개명되었다. 오늘날 옹기 만드는 일이 예능인로 대접받지만 옛날 독점이란 대우가 아닌 차별을 받았다. 특수한 마을이었던 만큼 경제활동 구성도 특이하다. 1970년 까지만 하여도 해안은 좋은 어장과 기름진 농토를 마다하고 마을에는 농업과 어업을 전업하는 주민은 없었다. 마을에는 오직 옹기(독)의 생산과 해상판매를 했던 선원들 및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주민으로 부락이 구성되어 있었다.

 

칠량 옹기마을의 선원구성:

마을입구에는 ‘고려옹기마을-봉황리’ 라고 적혀있으니 인근의 유명한 고려청자와 함께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옹기마을 시작은 고증되지 않았지만 생산된 옹기를 해상 판매하던 마지막 옹기배 운항은 최소한 1988년까지는 다닌 것으로 1995년 당시 이장님으로부터 확인하였다. 이곳 옹기는 남해안 전체로 팔려나갔고 아직 생존하는 뱃사공과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1975년경 당시 마을에 105가구에 605명이 거주했고, 400명이 옹기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였다.

 

결국 이 부락의 성인들과 청소년이 되면 옹기제작을 대행하는 40개의 동막과 4개의 옹기가마, 옹기, 흙, 땔감 운반, 그리고 돛단배를 타고서 옹기를 판매하는 선원들로 마을 인원이 구성되었다. 즉, 옹기의 생산, 관리, 판매 3대 요소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현대식 상업체제를 구비한 셈이다.

 

1970년대는 포구에 40여척에 15-20m 크기의 옹기 돛단배가 있었다. 이 마을 남자 1/3은 15세가 되면 선원이 되며 밥하는 화장으로 시작하여, 조(웃)동무, 사공으로 종사한 뱃사람이 모두 120명이나 된다. 이런 구조의 자연 부락은 한국 어디에서도 찾아 수 없는 특이한 경제구조이며 더욱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까지 돛단배로 남해안 뱃길을 누비며 옹기 판매유통에 종사했다.

 

옹기 가마:

길이 40-50m, 넓이 3-4m, 높이 2m, 3-4일간 불을 지펴 1,200-1,300도 온도에서 옹기는 구워진다. 1970년대 이전 전성기에 가마 1개당 년 30-40굴(회)을 굽었고, 마을의 4개 가마에서 연간 160굴을 했다. 한 굴에서 약 천개의 옹기가 만들어 졌고, 4개의 가마에서 일 년에 약 16만개의 옹기가 봉황 포구에서 생산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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