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 해운업① - 사라진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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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 해운업① - 사라진 풍습
  • 전우홍
  • 승인 2015.12.0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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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돛단배. 1980년대 촬영. 전남 강진 칠량면 봉황리를 중심으로 운행하던 돛단배는 옹기를 가득 실고, 수로(水路)의 출구인 마량과 까막섬 사이를 바람을 가득 안고서 범주(帆走)하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1980년경 당시 마량포구 장터에서 서울사진관을 운영하던 박득만씨가 찍은 것이다.

 

전우홍 (박초풍)

 

한국의 마지막 돛단배의 운항은 한반도에서 올림픽이 이루어지던 1988년 언저리까지 실제로 옹기를 실은 무동력의 돛단배가 도서와 해안지방의 항과 포구를 방문하여 판매하는 일종의 토속 해운업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강진은 고려청자로 너무 유명세를 타서 인근 칠량옹기의 지명도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강진 칠량면 봉황리는 1980년대 까지 특이한 경제구조를 가진 자연부락으로 노동력이 있는 주민 대부분은 옹기생산과 해상판매 및 그와 관련 일에 종사하였다. 이 글은 봉황리의 옹기생산과 그 판매가 옹기배(돛단배)에 실어 제주도를 포함한 목포에서 부산까지 남해안 전체해역을 대상으로 항포구를 방문하여 판매를 하였고, 그 운반 매체인 옹기돛단배를 부리던 뱃사람들의 언어와 토속적인 해운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옹기돛단배는 최소한 1988년까지 실제로 운항되었고, 그 형체는 1995년까지 봉황리 포구 갯벌에 남아있었다.

옹기돛단배를 처음 본 것은 1975년 제주항 산지천 입구에서 옹기를 판매하던 그 배를 보았고, 돛단배의 운항이 아직 남아있음을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이후 해군을 제대하고 1981년 다시 제주를 찾았을 때도 옹기돛단배를 다시 보았고, 이번에는 직접 배에 올라 사공과 면담하며 옹기배의 항해와 특성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당시 1,000여개 이상의 옹기를 돛단배에 싣고서 제주도에서 약 2개월간 판매하고 돌아 갈 때 좋은 바람을 받으며 제주에서 강진 봉황리까지 8시간이면 주파한다는 돛단배의 속도가 믿기지 않았었다. 사공에게 그들의 고향(故鄕)이며 모항(母港)인 봉황리 귀항(歸航)길에 승선을 허락받았지만 끝내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 이후 한선(韓船)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하면서 그 배를 타보지 못한 미련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다시 옹기배와 인연은 1995년 일본을 요트로 방문후 조선통신사들이 타고 다니던 사신선(使臣船)을 알게 되면서 예전에 만났던 옹기배가 떠올라서 아직까지 존재할까? 하는 마음으로 당시 봉황리 김 오응 이장(전화: 0638-433-0131)께 문의했지만 그 옹기배 1992년 까지 포구에 돛단배 형체가 남아 있다가 지금은 완전히 패선되어 그 잔해(늑골) 포구의 갯벌에 박힌 채로 남아 있다고 하였다. 1981년 당시 제주에서 옹기배를 타고서 방문하려고 했던 봉황 포구를 1995년 승용차로 처음 방문하여 옹기배의 잔해를 직접 보았고, 마량선창의 사진관에서 옹기돛단배의 사진을 구입하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이후 한선에 대한 관심으로 MBC-TV에서 1996년 신안유물선을 복원하여 중국 영파, 한국 신안/목포, 일본 교오토/오사카의 옛 해운로를 탐사하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방치되어 있던 30m 길이의 목재범선 ‘700년전의 약속호’을 구입하여 2년간 운영을 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옹기배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에도 4차례 봉황리를 방문하여 김우식(86세) 사공과 그곳 노인정에서 옛 사공들을 통해서 돛단배에 대한 구술을 듣긴 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없는 매우 단편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때 김 사공으로부터 당시 옹기배에서 사용했던 저울과 제주도에서 바닥짐에 실어온 현무암 계주석(繫柱石) 그리고 부락 노인들로부터 배의 치와 몇 점의 해양유물을 수집할 수 있었다.

옹기배에 대한 열정은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2009년 4월-10월 사이에 매달 1차례씩 ‘전통 돛단배 항해기술 연구 워크숍’을 주관하였고, 그 모임에 참여하여 봉황리 옹기돛단배 출신인 신연호 사공을 만나면서 다른 사공들과 달리 옹기돛단배의 자세하고 구체적인 구술을 직접 듣게 된 것은 하나의 축복이고, 돛단배의 운항과 조정술을 정리 할 수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신사공이 참여했던 ‘청자보물선(온누비호) 항로탐사’인 강진마량에서 강화도를 왕복하는 6일간(2009년 8월 3-8일)의 항해를 함께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구술과 현장학습을 통하여 그간의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지만 단절되었던 돛단배의 조정과 운항에 대한 무형의 기술들을 복원하기에는 여전히 미비한 수준이었다.

당시 온누비호의 ‘청자항로 항해탐사’ 연구책임자로 승선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곽유석 과장님은 신사공 같은 돛단배의 마지막 세대가 살아계실 때 옹기 돛단배를 복원하여 그들과 함께 직접 항해하면서 한반도 해운의 역사를 이어 온 선조들의 무형(無形)의 조정과 운항술을 배울 수 있도록 옹기배 복원을 구상했고 실천에 옮겨 옹기돛단배, 봉황호는 2010년 6월 29일에 진수되었다. 약 30년간 단절되었던 강진 ‘옹기배 해상로드 탐사길’은 2010년 9월 8일-11일 칠량옹기 기능장 정윤석님이 만든 다양한 종류의 옹기 300여점을 한 배에 싣고서 가능한 옛 방식대로 강진 봉황포구에서 여수 구항(舊港)까지 항해가 실행될 수 있었다. 그 탐사에도 참여하여 신사공으로 부터 의문난 점과 보다 세부적인 설명과 실습, 지난 구술을 보충하여 옹기-돛단배의 조정과 운항술의 90%정도는 정리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기록은 다음세대에 전해질 수 있음이 큰 수확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본 내용은;

* 전남 강진 봉황리(칠량독점)에서 생산된 옹기가 돛단배를 통하여 해상 판매를 하였던 일종의 토속 해운업을 중심으로 꾸몄다.

* 강진 해안의 옹기를 판매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던 돛단배 뱃사람들의 옹기 이야기는 해상운송과 옹기판매의 이야기이다.

▲ 1985년12월26일 경향신문: 2010년 강진신문에 재인용 발취-옹기돛단배 일성호. 모두 3척이 남아고 사진은 완도항에서 청산도 혹은 신지도로 향하는 모습 (조희춘)

 

강진 옹기마을과 토속 해운업의 특수성

 

강진(탐진)은 육상교통이 발달되기 전까지 남해안 해운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제주와 남서해안으로 왕래되는 많은 물류는 강진을 경유하게 된다. 이는 위치학적으로 남해안의 섬들과 해상으로 연결되고 또한 한양으로 연결되는 육상 물류 중심지가 강진이었다.

그 이전 강진 포구 전체가 장보고의 청해진에 속하였고, 봉황리 옹기마을은 그곳과 불과 8마일 거리이며 청해진의 해상무역 교역은 중국 도자기(해굽무늬)를 구매하여 일본에 판매하는 해상 중계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청해진은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강진 대구면에 당시 최첨단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청자의 집단생산 체제를 만들어 대량생산과 해상운송 및 판매를 하였다. 이들 청자가마터는 봉황리 포구에서 불과 6km정도 거리이다. 이제 장보고와 청해진은 역사 속에 각인된 명성이겠지만 그 해상세력의 후예들은 민초로서 역사의 뒤 안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1980년 후반까지 무동력 옹기 돛단배를 탔고 토속적인 해운업을 하던 우리 옹기 뱃사람들이 바로 이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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