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5.18묘역서 그 말을 심장에 받아 적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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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5.18묘역서 그 말을 심장에 받아 적듯이
  •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1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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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 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리뷰
이탈리아 ‘말라파르테(Malaparte) 문학상’ 수상
광주민주화 항쟁을 배경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광주의 비극을 담담히 그려
소년이 온다. 창비 펴냄
소년이 온다. 창비 펴냄

[오피니언뉴스=강대호 북칼럼니스트] 언젠가 서점에서 잡지를 뒤척이다가 어느 산문 제목에서 제 눈이 멈춘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심장에 받아 적듯이'. 저는 잠시 그 뜻을 헤아려 보다가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2017년에 소설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서 발표한 수상소감이었습니다. 그 글이 창비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걸 읽은 겁니다.

작가는 자기의 삶을 짧게 언급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내면적인 것”이라며 작가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자기의 감각, 감정, 몸, 삶을 광주의 모든 희생자에게 빌려주고 싶었다”고요. 그런 고백이 시인이기도 한 작가의 유려한 글로 휘몰아쳤습니다. 제 심장에도 전해지는 듯했고요.

그래서 '소년이 온다'를 '채식주의자'보다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그녀가 등단한 1993년은 오랜 군사 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시대의 중압에서 벗어나 인간을 탐색할 자유를 얻게 된 첫 세대의 작가군'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시대의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터진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희생자들을 그린 '소년이 온다'를 썼을까요? 어쩌면 지금을 사는 광주 출신 작가로서의 부채감이 어느 정도 있었던 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소설은 제목에도 나온 어떤 소년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삶과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소년 동호는 실종된 친구를 찾으러 나섰다가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작품에서 직접 말하지 않았어도 1980년 5월 광주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소년 옆에는 함께 시신관리를 하는 여고생과 여성 노동자가 있고 그들을 돕는 남자 대학생이 있습니다. 소설은 초반을 지나며 소년을 제외한 이 세 명의 삶을 관찰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소년 동호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중학교 3학년이었던 동호는 마지막 날 도청에서 다른 시민들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소설에서는 사살되는 것으로 묘사되고요.

소설에는 소년의 가족들도 나옵니다. 어머니와 형들. 그들은 아들이, 동생이 도청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동호는 거절합니다. 소년은 실종된 친구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걸 목격했지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자기의 모습을 자책하고 있었던 걸까요?

소설 많은 부분이 상무관에서 함께 있었던 세 사람의 살아남은 삶을 담담히 보여 줍니다. 여고생이었던 소녀는 출판사 직원이 된 모습을, 여성 노동자는 시민단체의 간사가 된 모습을, 남자 대학생은 생존자들을 만나며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나왔고 시간도 많이 흘렀지만, 자기들이 경험했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특히 소년, 동호의 마지막 모습을요. 그들은 소년을 끌어내서라도 집에 보냈어야 하는 건 아니었냐고 자책을 하며 삽니다. 그 자리에 자기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며. 그들은 환영 속에서, 현실의 투영 속에서, 혹은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소년을 만나고 그때마다 또 자책합니다. 살아있어도 장례식이라면서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102)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년의 제삿날에 남은 형제들이 왜 막내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는지 서로를 원망하고, 어머니는 그날 둘째 아들과 도청으로 막내아들을 데리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 것을 한탄합니다. 혹시나 함께 간 둘째 아들도 도청에 남는다고 할까 봐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요.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185)

 

그런 어머니는 강했지만 약해졌습니다. 뜨거웠지만 차가워지나 봅니다. 어머니는 방금 깐 아스팔트가 따뜻하다 하시니까요. 뜨거운 한여름인데도요.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면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190)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강은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80년 봄이 지난 어느 날, 어린 시절 광주에 살던 집 아이가 5월에 죽었다는 어른들의 소곤거림을 듣고 이 소설이 시작되었다고요. 그렇지만 작가는 광주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 있을까는 오래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작품을 쓰기로 하고 취재하면서 작가는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213)

 

이런 깨달음에서 나왔을, 도청에 있었던 시민들 마지막 순간의 마음을 표현한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피구시합에서, 날쌔게 피하기만 하다 결국 혼자 남으면 맞서서 공을 받아안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처럼. (175)

 

소설은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광주를 이야기합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이 왜 벌어졌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보여 줄뿐입니다.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그날 파괴된 영혼들 대신 전해”줍니다.

그리고 “광주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외칩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약 열흘 동안 벌어진 일들이 아직 마무리된 게 아니라는 걸 소설 내내 이야기합니다. 소설에서 어느 심리학자 입을 빌려 이야기한 것처럼요.

 

저는 그 폭력의 경험을, 열흘이란 짧은 항쟁 기간으로 국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의 피폭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몇십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162)

 

등장인물들은 광주를 떠나 살아도 마음만큼은 그날 광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살면서 겪는 여러 상황을 5월 광주와 겹쳐서 보고, 고문 후유증 때문에 남자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고, 살아남은 괴로움에 끝내 자살까지 하면서요.

소설에서의 묘사가 아니더라도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느끼는 요즘입니다. 정치인들이 광주로 이슈를 만들려 하고, 진실이 새로 나올 때마다 극구 부인하는 모습을 보니까요. 그리고 은퇴한 정보 기관원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상식을 새삼 깨닫기도 합니다.

 

연합
이낙연 국무총리가 5.18 옛 묘역에 들어서면서 바닥에 묻힌 전두환 기념비를 밟고 있다. 옛 묘역 길목의 전두환 기념비는 1982년 전남 담양군 마을을 방문한 전 전 대통령이 세운 비를 광주·전남민주동지회가 1989년 부순 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묻었다. 사진=연합뉴스(2018.5.18)

지난 3월에 광주에 갈 기회가 있어서 국립518민주묘역에 가봤습니다. 잘 정리된 신묘역을 둘러보고 그 근처 망월동 구묘역에도 들렀습니다. 1980년대 말에 처음 갔을 때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너무나 촘촘했던 봉분들과 묘비들을요. 신묘역이 생겼지만, 예전 봉분을 가묘로 보존해서 촘촘한 모습은 그때 그대로였습니다.

학살 책임자가 방문해서 영광이라는 기념 돌조각이 바닥에 깔린 걸 보았습니다. 계단이라서 자연스럽게 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에 묻혔던 사람들의 진심이 세상에 닿기를 바라면서요. 그리고 내 오른손이 왼쪽 가슴에 올려져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도 심장에 받아 적을 말을 듣고 싶었나 봅니다.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수상 당시의 한강 작가.사진=연합뉴스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수상 당시의 한강 작가.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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