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노량', 10년의 대업...아쉬움이 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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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노량', 10년의 대업...아쉬움이 남는 이유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4.01.18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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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개봉 초반 흥행 기대작으로 관심을 모았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17일 기준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노량’은 누적관객 수 441만명을 동원하며 ‘외계+인 2부’, ‘위시’, ‘서울의 봄’에 이어 박스오피스 순위 4위를 기록했다.

순제작비 286억을 쏟아부은 블록버스터치고는 만족스럽지 못한 스코어다. 흥행열기가 식어가고 있는 현재 온도로 볼 때, 손익분기점이 되는 관객수 720만명을 돌파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극장을 나설 때 이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다. 이순신 3부작의 피날레 라고 하는 ‘절대적 기대’를 지우고 ‘노량’만 따로 떼놓고 보더라도 ‘재미지수’가 높지 않다.

영화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그것이 슬픔이건 즐거움이건 아픔이건 간에 작품이 주는 ‘재미’에 기반 한다. 아쉽게도 2시간 33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동안 가슴에 큰 일렁임은 없었다.

물론 하나의 작품이 관객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전쟁 액션 대작’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관객은 그 과정을 평가하지 않는다. 

노량의 패인으로 경쟁작 ‘서울의 봄’의 막강한 화제성과 주 관객층이 2030세대가 아닌 중장년 세대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서울의 봄’이 1280만 관객을 넘어서며 그 화력이 전과는 다른 상황에도 ‘노량’의 관객 수는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마케팅 수단인 ‘입소문’은 주 관객층이 어떤 세대냐에 따라 시간차는 있을지 몰라도 재미있는 작품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뒷심을 발휘하게 돼있다. 결국 ‘노량’의 패인은 이러한 외적요인 보다 내적 요인에 있다는 의미다. 

감정 빌드업으로 연결되지 못한 스토리 빌드업

영화 ‘노량’은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왜군을 완벽하게 전멸하려는 이순신 장군 생애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을 그리고 있다. ‘동아시아 최대의 해전’, ‘이순신 장군의 최후’라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관객은 스토리의 힘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초반 1시간가량을 영화는 온통 ‘시각적 설명’에 할애한다. 노량해전이 시작되기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부터 조명연합수군의 작전상황 등 일명 빌드업 과정이 펼쳐지는데, 관객의 감정은 전혀 빌드업 되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다. 눈은 자막을 따라가기 바쁘고, 작품 전개는 한없이 지루하다. 속도감 있게 덜어내고 압축했어야 했다. 

마침내 시작된 ‘노량해전’. 100분 동안의 해상전투는 스펙터클 그 자체다. ‘명량’과 ‘한산: 용의출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야간 전투 장면과 조선, 명나라, 왜군이 등장하며 훨씬 커진 스케일은 빌드업 과정의 지루함을 덜어낸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3부작 내내 영화가 왜 시각예술인지를 제대로 입증해내는데, 특히 ‘노량’은 VFX 테크닉이 가히 압도적이라 할만하다. 물에 배를 띄어 촬영하는 것이 당연했던 해전을 ‘한산’에 이어 이번에도 역시 강릉의 스피드 스케이트 경기장에 대형 세트장을 세워 CG를 이용해 바다 없이 완성했다. 10년의 세월동안 그야말로 ‘영화기술의 빌드업’을 제대로 이뤄낸 것이다. 기술의 정교함은 감탄을 불러온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가 주는 건 거기까지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 컷

신파의 지나친 경계로 사라진 카타르시스

작품 후반부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는 그동안 드라마로 봐왔던 엔딩의 전형성을 탈피해 이순신 장군의 죽음까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성을 갖는다. 특히 타악기 중 북소리는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데, 문제는 타이밍 오버라는 사실이다. 진한 여운을 자아내는 북소리는 그 역할을 다하고도 내내 이어지면서 마치 억지로 ‘감동연장’을 요구받는 느낌마저 든다. 혹자는 이순신 장군의 전사 장면을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세련된 연출이라고 호평하기도 하지만 세련됨이 지나쳐 담담하기만 하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온 국민이 알고 있는 그의 최후에서 관객은 큰 감동 한 방을 기다렸을 터다. 적어도 아들 면(여진구 분)의 죽음을 대하는 아버지로서 이순신 장군의 고뇌와 그의 마지막은 투박한 신파가 통하지 않았을까. 촌스럽다고 할지언정 관객은 가슴 뭉클한 감동과 눈물 한방울을 기대한다. 신파를 지나치게 경계하다 보니 카타르시스에 닿기가 어렵다.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이순신’이라는 한 인물에 천착해 온 김한민 감독 특유의 집념과 영화적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순신 3부작 ‘노량’의 유종의 미를 기대한 관객에게 영화가 보여준 기술의 감탄이 스토리의 감동으로 연결되지 못한 연출은 못내 아쉽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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