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영화의 힘으로 봉인해제 된 역사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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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영화의 힘으로 봉인해제 된 역사 ‘서울의 봄’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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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세상 가장 슬픈 군가가 흐른다. 마치 산화 돼 버린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진혼곡 같다. 꾸역꾸역 차오르는 감정에 목이 메여온다. 영화는 끝났지만 망부석이 된 듯 차마 자리를 뜨기 힘들다. 예술이 주는 ‘카타르시스’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휘몰아친다.

‘서울의 봄’, 9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의 역사가 이토록 아픈 것이었단 말인가. 영화의 힘으로 완벽히 봉인해제 된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저릿해진다. 권력찬탈이 이뤄진 44년 전 서울의 밤은 기대했던 ‘서울의 봄’을 거세해버린다.

판타지 따위 존재하지 않는 ‘정치 스릴러’

영화는 무엇이 팩트인지, 픽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과몰입을 유발한다. 전두광 보안사령관(황정민 분)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정우성 분)을 핵심으로 한 진압군의 숨 막히는 대립은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12.12 군사반란’, 이미 역사가 그렇게 정의내린 그 날의 9시간을 작품은 선과 악, 신념과 욕망의 대결로 설득력 있게 그려나간다. 김성수 감독이 19살 때 한남동에서 직접 들었던 총성의 진실엔 ‘선’이 ‘악’을 이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런 판타지가 낄 틈 없는 이 ‘정치 스릴러’는 관객으로 하여 극장이라는 현실의 공간을 잊고 1979년 12월 12일, 기꺼이 그날의 관찰자로 나서게 만든다. 

영화는 권력욕의 화신 전두광과 그에 동조한 하나회만을 단지 악의 세력으로 그리지 않는다. 반란 진압 명령이라는 명확한 정답 대신 사후재가를 택한 군 최고 통수권자 최한규 대통령(정동환 분)의 무능, 총성에 놀라 잠옷 바람으로 도망친 국방장관(김의성 분)까지 역사의 원죄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등 떠밀렸을지언정 권력찬탈을 완성케 한 이들이기에 비난과 조롱을 넘어 그날의 ‘패자’로 각인시킨다. 

반면 결코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는 끝이 보이는 싸움, 승자와 패자가 결정나버린 순간에도 전두광에게 보란 듯이 바리케이드를 넘어오는 이태신의 신념에 찬 모습은 큰 울림을 준다. 지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그날을 기억해야 할 이유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극명한 선악의 대립구도는 히어로를 필요로 한다. ‘서울의 봄’의 히어로는 단연 이태신이다. 전두광에 의한, 전두광을 위한 9시간이었지만 이태신의 존재로 인해 그날의 승자가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없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그는 영웅 없는 시대에 영웅이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투영된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지더라도 싸울 줄 아는 영웅, 2023년 지금, 부재한 히어로.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기억해야 할 그날을 목도하다

이보다 더 선명한 엔딩이 있을까. 단 한 장의 사진으로 1979년 12월 12일, 그날을 목도한다. 영화는 탐욕으로 완성된 역사, 신군부세력이 누려왔던 세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가 아닌 ‘실화에 방점이 찍힌’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그들만의 ‘혁명’이 결국 ‘반란’으로 단죄 된 ‘팩트’를 소환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작품의 온도가 분노를 넘어 가슴이 뜨거워진 데엔 바로 ‘지더라도 싸웠던’ 진압군의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군에 맞서 사령관을 지키다 전사한 특전사 오진호 소령(정해인 분) 장면은 신파가 아닌 실로 가슴 아픈 실화다. 5, 6공화국 내내 실제 인물이었던 ‘김오랑’ 소령 세 글자는 군에서 금기어였다고 한다. 

영화 ‘서울의 봄’은 진압군이었다는 이유로 당시에 산화돼버린, 그리고 질곡의 세월을 견뎌왔을 이들을 기억해야 할 비극이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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