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㊺ 용의 기운이 흐른다는 용산(龍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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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㊺ 용의 기운이 흐른다는 용산(龍山)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1.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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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용산, 하면 어디가 떠오르나요? 대통령실이나 고급 아파트단지를, 혹은 BTS 소속사인 하이브 사옥을 떠올리는 이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과거에 있었던 ‘용산 참사’를 떠올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고 보면 이태원도 용산구에 있습니다.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용산은 어떤 지역일까요? 용산(龍山)은 말 그대로 산을 뜻했습니다. 김정호가 제작한 ‘경조오부도’에 19세기 초 무렵의 한양도성과 성저십리 일대가 잘 나와 있는데 용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모악(母岳)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아현과 만리현, 그리고 효창묘를 지나 한강으로 향합니다. 그 끝자락에 용산(龍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산줄기가 뻗어 나가는 모습을 두고 용의 형상과 닮았다거나 용이 한강으로 물 마시러 가는 형국 같다고 했습니다.

용의 형상을 닮은 산줄기 

조선시대에 용산은 숭례문 바깥의 성저십리인 한성부 용산방(龍山坊)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용산방은 지금은 복개된 만초천(蔓草川)의 서쪽인 청파역과 공덕리, 그리고 마포나루 일대에 걸쳐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용산방의 많은 지역이 마포구에 속합니다. 실제로 효창공원과 용마루 고개, 그리고 용산(龍山)은 마포구와 경계를 맞대고 있습니다.

용산구인 ‘효창공원역’이나 마포구인 ‘공덕역’에서 용마루 고개를 올려다보면 고층 아파트 단지가 보입니다. 아파트가 건축된 지형을 잘 살펴보면 효창공원에서 한강 쪽으로 흘러내리는 구릉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이 용산(龍山) 자락입니다. 그 정상에 용산 성당이 있습니다.

용산(龍山) 정상에 있는 용산 성당. 아파트와 건물 사이로 멀리 한강이 보인다. 사진=강대호

용산 성당은 해발 약 90여m 용산(龍山)의 정상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당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에는 한강이 드넓게 펼쳐졌겠지만, 지금은 한강철교와 원효대교만 살짝 보입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용산(龍山) 자락 일대와 지금의 청파동과 공덕동, 그리고 마포나루 일대를 용산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미군기지와 대통령실이 자리한) 만초천 동쪽 지역에 일본 군사시설과 배후 시설이 들어서며 기존의 용산은 구용산으로 불리게 되고 새로 개발된 지역이 신용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군 기지와 대통령실이 자리한 곳은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그곳에는 둔지산(屯之山)과 둔지미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곳에 일본군 기지가 들어서기 전이었지만요.

지금은 민간인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둔지산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전쟁기념관에서 대통령실 방향을 바라보면 경사진 구릉에 들어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의 흔적입니다.

둔지산과 둔지미가 있던 지역은 조선 후기에 둔지방(屯之坊)이라는 행정구역이었습니다. 둔지방은 한성부 성저십리 남부에 속했고, 용산방은 서부에 속했었습니다. 경조오부도 등 옛 지도를 보면 두 지역을 사이에 두고 만초천이 경계선처럼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시의 형태를 규정짓는 요소에 하천이나 산 같은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둔지방과 용산방은 당시에는 큰 하천이었던 만초천을 경계로, 그리고 용산과 둔지산이라는 두 산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나눈 것이었습니다.

1911년 만초천 동쪽인 둔지방 일대에 들어선 일본군 군영지.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둔지산 일대는 일본군 군사 용지로 수용되었습니다. 1904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결과였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 어디에서나 임의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용지 수용권도 포함되었습니다.

관련 문헌을 종합하면, 1906년 4월부터 둔지산 일대에 기지 건설이 시작되어 일제강점기 내내 크고 작은 일본군 시설 공사가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둔지미에 살던 주민들은 집과 땅이 강제수용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용산구 보광동의 전통 마을 중에 '웃보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1916년 이주민들에 의해 생겨난 마을이었습니다. 이들은 한일의정서로 군사 용지로 수용된 둔지산 기슭의 둔지미 마을에 거주한 주민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보광동 주민센터 일대에는 과거 웃보광 마을의 구획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둔산(倭屯山)이라 부르기도 했던 둔지산 일대에는 각종 일본군 본부 건물과 군인들 숙소, 사격장과 연병장,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화장장과 매장지까지 있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당시 건축물인 일본군 여단장 숙소는 현재 국방부 내 고급장교 관사로 쓰인다고 합니다.

둔지산 일대에 일본군 군사시설이 들어선 다음에는 만초천 동쪽 지역으로 일본인 주거지와 일본군 배후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이때 택지로 개발된 후암동은 고급 주택지가 되었고 용산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물류 전초 기지가 되었습니다. 한강대로도 원래는 일본군이 병참 수송을 위해 뚫은 길이었습니다. 

용산역 앞 한강대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병참 도로로 건설된 게 한강대로의 시초다. 사진=강대호

전차 노선에서 비롯된 신용산

일제는 군사시설이 있던 이 지역을 신용산으로 불렀습니다. 그 시작은 전차 노선이었습니다. 1899년 12월에 개통된 용산선의 종점인 용산역은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910년 7월에 용산역 방향으로 연결된 전차의 종점을 ‘신용산(新龍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기존 용산 포구 쪽에 있던 종점을 ‘구용산(舊龍山)’으로 이름을 바꿨지요. 

일본군은 각종 기지시설에 아예 ‘용산’이라는 지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차츰 그 지역을 둔지방 대신 용산으로 인식하게 되었고요. 혹자들이 용산 대통령실을 두고 용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라 했던데 사실 용산은 그곳이 아니었던 거죠.

오늘날 용산은 다양한 지역성을 갖고 있습니다. 보광동처럼 일제에 의해 고향 땅을 잃은 사람이 터를 닦은 동네가 있는가 하면 이태원처럼 이방인들에게 터전을 허락한 동네도 있습니다. 또한 용산에 깔끔한 아파트단지가 있는가 하면 재개발이 시급한 서민 주거 공간도 있고요. 안타깝게도 용산 참사나 이태원 참사처럼 참사의 고장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지만요.

무엇보다 용산은 대통령실 덕분에 사람들 관심이 쏠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전엔 서촌 일대가 온갖 시위로 시끄러웠다면 지금은 용산 전쟁기념관 앞 인도가 시끄럽습니다. 대통령실 바로 건너편이지요. 시끄러워도 갈등을 풀어가는 소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용산을 신용산과 구용산으로 나누는 경계이기도 했던 만초천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겠습니다.

용산 대통령실 인근.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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