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㊹ 핫플레이스 아닌 '아픔의 공간'이 된 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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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㊹ 핫플레이스 아닌 '아픔의 공간'이 된 이태원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2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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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이태원 참사가 1주기를 맞이했습니다. 속보가 이어지는 뉴스를 보면서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충격에 빠졌던 그 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그날의 참사를 그냥 묻어버리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이에게 이태원은 2022년 10월 29일의 그 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아픔의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핼러윈 파티를 즐기기 위해 모일 정도로 이태원은 핫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이태원은 다양한 지역성을 지녀왔지요. 처음에는 용산에 주둔한 외국군대의 배후 지역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태원, 용산에 주둔한 외국군대의 배후지역

용산에 외국군대가 주둔한 역사는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본군 병참부대가 주둔한 곳이 용산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용산에 군사기지를 조성했습니다. 용산에 들어선 일본군 기지는 이태원에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단지와 상업시설이 들어선 계기가 되었지요. 일본군 기지의 배후 지역이 된 이태원은 용산과 서울 동부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이태원 참사 현장. 참사 1주기를 앞두고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 조성되었다. 사진=강대호

이태원은 원래 남산자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태원의 많은 공간이 남산 남사면의 경사진 구릉에 들어섰습니다. 만약 이태원을 관통하는 도로가 없었다면 교외 주택지인 장충동과 용산은 단절된 모습이었을 겁니다. 경성 도심을 거쳐 멀리 돌아가야 했으니까요. 조선총독부가 ‘남산주회도로’를 건설한 이유입니다. 

1938년에 개통된 ‘남산주회도로’는 용산에서 이태원을 관통해 장충동까지 이어졌습니다. 용산에서 경성 도심을 거치지 않고 경성 동부 지역으로 곧장 갈 수 있었지요. 덕분에 이태원 일대는 일본군 배후 지역으로도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거주 공간과 상업지역으로도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산주회도로’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용하고도 있고요. 현재의 이태원로 대부분과 한남대로의 일부, 그리고 장충단로 일부가 ‘남산주회도로’의 흔적입니다.

해방 후 일본군 기지 자리에는 미군이 주둔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 이태원은 본격적으로 기지촌이 되었습니다. 용산에 주둔하는 미군뿐 아니라 한국 곳곳의 기지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즐겨 찾는 유흥가가 되었지요. 

이태원은 미군뿐 아니라 다양한 외국인들이 찾는 곳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국내 거주 무슬림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서울 성원’이 있으니까요. 

이슬람 서울 성원은 1969년 5월 한국 정부가 약 1500평의 성원 건립 용지를 한국 이슬람교 측에 기부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국가가 건립 비용을 지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74년 10월 착공했고, 1976년 5월 21일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입니다.

‘이슬람 서울 성원’이 있는 우사단로10길에는 중앙아시아와 아랍권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 회사들과 여행사들, 인도 요리와 터키 요리를 파는 음식점들, 그리고 할랄 식재료를 갖춘 식료품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국적 분위기를 찾는 한국인들이 찾는 동네이기도 하지요.

한남대로에서 바라본 ‘이슬람 서울 성원’. 사진=강대호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이태원 우사단로 일대에 이슬람 국가 출신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 것은 1980년대 말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출신 모슬렘 노동자들이 한국에 유입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1990년대 초에 이들에게 식료품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가 이슬람 서울 성원 근처에 들어선 게 이슬람 거리가 된 계기라네요.

그런데 우사단로10길은 이태원동뿐 아니라 한남동과 보광동에 걸쳐 있습니다. ‘이슬람 서울 성원’은 이 길의 이태원동이 끝나는 지점, 즉 우사단로10길의 한남동이 시작하는 지점에 있고요. 그러니까 ‘이슬람 서울 성원’은 한남동에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망자들에게 땅을 내어준 곳

이태원은 이방인들에게 터전을 허락한 곳이기도 하지만 망자들에게 땅을 내어준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태원 일대는 과거 공동묘지였습니다. 

조선 시대부터 이태원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글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이태원은 성저십리 지역이라 공식적으로는 묘지를 쓸 수 없었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에 규제가 느슨해지며 묘지가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광희문 밖 신당동이나 소의문 밖 애오개처럼요.

공동묘지 관련 연구를 종합하면, 이태원 공동묘지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1914년 12월 ‘이태원 모범묘지’ 신설을 알린 매일신보 기사가 최초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묘지 규칙’을 제정해 관청에서 직접 공동묘지를 만들고 관리했는데 이태원 공동묘지가 초기 사례 중 하나인 거죠.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의 ‘유관순 열사 추모비’. 열사는 순국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사진=강대호

이태원 공동묘지는 유관순 열사와 관련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1920년에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자 이화학당 측에서 열사의 시신을 수습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중반에 이태원에 남산주회도로를 뚫고 한남동에 고급 주택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태원 공동묘지를 파헤쳤습니다. 이때 연고 있는 묘는 후손들이 이장했지만, 연고가 없는 2800여 기는 경성부가 나서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했습니다.

1936년에 유관순 열사의 묘는 파묘되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열사의 부모는 사망했고 오빠는 투옥돼 무연고자로 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유관순 열사는 이름 모를 망자들과 함께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되었습니다. 현재는 ‘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와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로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에 가면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볼 수 있습니다. ‘부군당(府君堂)’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 놓은 제당을 말합니다. 원래 이태원 부군당은 남산 중턱에 있었는데 일본군이 훈련소를 세우면서 19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고지대에 자리한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에는 전망대도 있습니다. 멀리 전쟁기념관과 용산의 고층 건물들, 그리고 용산 대통령실이 보입니다. 그 앞으로 보이는 녹지대는 미군 기지였습니다.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에서 내려오면 이태원로가 나옵니다. 좀만 걸으면 지난해 참사가 벌어진 골목이 나오고요. 아마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이태원은 외국군대 주둔지, 외국인들이 많은 이국적인 동네, 그리고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핫한 공간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태원, 하면 참사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이태원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태원을 아는 많은 이에게 아픈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태원 부군당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용산 전경. 전쟁기념관과 용산 대통령실이 보인다. 앞쪽의 녹지대는 미군 기지가 있던 곳이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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