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㊶ 근대적 사고와 발전의 상징, 서울의 노면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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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㊶ 근대적 사고와 발전의 상징, 서울의 노면전차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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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노면전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전차는 오래전 운행을 멈춘 381호 전차입니다. ‘등록문화재’ 제467호로 등록된 이 전차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전시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문물이 된 전차는 서울이 근대도시를 거쳐 현대도시로 진입하는 많은 순간을 목격해 온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면전차는 1899년에 처음 개통되었습니다. 전차는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전력 발전소와 이를 운영할 회사가 필요했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전기를 만드는 발전 설비가 있었습니다.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경복궁을 밝힌 전등을 위해 건청궁에 발전 설비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경복궁만을 위한 소형 발전 설비였습니다. 

그래서 1898년에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한성전기주식회사는 노면전차 사업 외에도 서울에서 전기 사업과 전화 사업을 펼쳤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 발전소인 동대문 발전소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최초의 노면전차 노선은 '홍릉선'

우리나라 최초의 노면전차 노선은 1899년 5월에 개통된 ‘홍릉선’입니다. 서대문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쳐 홍릉까지 연결되었습니다. 청량리 인근의 홍릉에는 명성황후의 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면전차 부설의 목적에 근대 교통수단 도입은 물론 고종의 홍릉 참배에 편의를 제공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홍릉선의 서대문 기점은 1899년 9월에 개통된 경인선의 서대문 정거장과 바로 연결되었습니다. 당시 서대문 정거장은 경인선 열차의 출발지이며 종착지였습니다. 나중에 남대문 정거장, 즉 서울역에 경인선 종착지의 역할을 넘겨주지만 종로를 지나는 홍릉선 덕분에 종로가 더욱 번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대문을 지나는 전차. 동대문 북측 담장이 있는 걸 봐서 1911년 이전 사진으로 보인다. 1911년에 동대문 북측 성곽을 헐고 홍릉선 선로를 옮겼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1899년 12월에는 ‘용산선’이 개통되었습니다. 종로에서 용산까지 연결되었는데 용산으로 모인 화물과 승객을 도성 안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907년에는 종로에서 서대문을 거쳐 마포로 연결되는 ‘마포선’이 개통되었습니다. 덕분에 마포가 상업 중심지로 중요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차 도입이 불어온 풍경은 우리나라가 근대 국가로 진입하는 초기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당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귀신 들린 차라며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노면전차는 발전된 기술과 외부 세계의 변화를 몸소 느낄 수 있는 문물이었습니다.

우선, 노면전차는 ‘평등’이 펼쳐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차비만 있다면 누구나 탈 수 있었던 교통수단이었던 거죠. 차비만 있으면 평민도 탈 수 있었고 차비가 없으면 양반이라 하더라도 탈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반상의 차별이 무너지는 현장이기도 했지만, 전차는 남녀 간 유별이 사라지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여성도 남성과 함께 전차를 탈 수 있다’라는 표현을 전차 홍보 문구로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면전차의 도입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공간 개념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간에 맞춰 운행하는 전차를 이용하면서 사람들은 규칙성에 대해 학습하게 되었고, 먼 곳으로 이동이 편리해지며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습니다.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시대로 진입한 걸 전차를 타면서 실감하게 된 거죠.

하지만 노면전차 부설과 노선 확장 과정에서 잃은 것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한양도성과 성문의 훼철입니다. 주로 일제강점기에 벌어졌습니다. 

숭례문은 1907년에 일본 황태자 방문 행사를 위해 북측 성벽을 허물었고, 돈의문(서대문)은 1915년에 전차 궤도 복선화와 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성문과 인근 성곽을 허물었습니다. 소의문(서소문), 광희문(남소문), 혜화문(동소문)도 전차 궤도 부설과 도로 확장을 이유로 파손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서울 도심을 촘촘히 잇는 노면전차 노선을 만듭니다. 처음에는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 위주로 놓았다가 나중에는 총독부가 자리한 광화문 일대, 그리고 군대가 주둔한 신용산을 노면전차로 연결합니다. 그리고 교외인 노량진과 돈암동, 뚝섬 일대까지 노선을 확대했습니다.

1966년 동대문 전차사업소.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노면 전차에 타격을 준 6·25전쟁

이렇듯 전차 노선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윤곽을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서울 시민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은 전차에 큰 타격을 줍니다. 89대가 전소돼 일부 노선을 축소해 운영해야 했습니다. 

서울 시민이 늘어나자 대중교통수단으로서 노면전차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버스와 택시가 늘어나며 노면전차의 한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게다가 느린 속도의 전차는 교통난의 원인으로 꼽히게 됩니다. 결국 전차는 도로의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그 해결책은 노면전차를 증차하거나 다른 교통수단으로 대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시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확장하는 도시에 맞춰 궤도를 놓기보다는 버스 노선을 늘려 전차가 가지 않는 곳을 연결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으니까요.

서울시는 1966년에 교통난 완화책을 발표합니다. 그중 하나가 지하도 건설이었습니다. 첫 번째 대상지가 세종로 지하도여서 전차 궤도 철거가 불가피했습니다. 지금의 광화문사거리입니다. 

당시 서울 전차는 한국전력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원활한 도로 공사를 위해 서울시가 전차 사업을 인수했습니다. 한국전력은 우리나라에 전차를 도입한 한성전기주식회사의 후신인 경성전기, 그리고 남한의 또 다른 전력 회사이었던 조선전업과 남선전기를 합병해 1961년에 출범한 회사입니다.

결국 1968년 11월 29일 모든 전차 운행이 중지되었습니다. 전차 궤도는 1970년까지 차례로 철거되었고 일부는 그대로 콘크리트로 메워졌습니다. 광화문 월대 복원 공사를 위해 광화문 일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도로 아래에 묻혀 있었던 전차 궤도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울 시내에서 전차와 궤도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된 ‘381호 전차’와 마포의 대로변과 동대문의 호텔 앞에 놓인 표지석으로요.

마포대교 인근 어린이 공원의 마포종점 노래비. 사진=강대호

마포에는 전차 종점이 있었습니다. 마포역 인근 ‘불교방송’ 건물 입구에 ‘3·1 독립운동 기념터; 마포전차종점’이라고 쓰인 표지석이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마포종점은 ‘은방울자매’의 노래로도 알려졌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마포종점’ 노래비가 마포대교 인근 어린이 공원에 놓여 있습니다. 인근의 다른 공원에는 전차 모양으로 디자인한 화장실도 있습니다.

동대문에는 전차 차고와 화력 발전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동대문 건너편의 ‘메리어트 호텔’입니다. 호텔과 인도 사이 화단에 과거 흔적을 알리는 표지석이 놓였습니다. 전차 차고와 발전소가 헐린 후 그 자리는 고속버스터미널로 이용되었고, 터미널이 강남으로 이전을 완료한 1977년부터 호텔 건축을 시작한 2011년까지는 주차장으로 쓰였습니다. 

이 표지석 건너편에 다른 표지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경성궤도회사 터’ 표지석인데요, 경성궤도회사는 경성전차를 운영한 경성전기주식회사와는 다른 회사입니다. 경성궤도회사도 노면전차를 운행했는데 사람들이 ‘기동차’라고 불렀습니다. 기동차 노선은 동대문에서 왕십리를 거쳐 뚝섬과 광나루까지 연결되었습니다. 다음 주에 경성궤도의 기동차 이야기를 이어서 하겠습니다.<매주 일요일 연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된 381호 전차.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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